빛이 춤을 추니, 그림자도 춤을 춘다[이중원의 ‘건축 오디세이’]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0월 30일 03시 00분


코멘트

<19> 이응노미술관

이응노미술관의 시작점인 입구 부분. 지붕의 격자보가 보이고, 소나무 뒤로 미술관의 동서를 관통하는 긴 벽이 보인다. 전면에 벽돌벽이 관통하는 부분이 로비다. 그림 이중원 교수
이응노미술관의 시작점인 입구 부분. 지붕의 격자보가 보이고, 소나무 뒤로 미술관의 동서를 관통하는 긴 벽이 보인다. 전면에 벽돌벽이 관통하는 부분이 로비다. 그림 이중원 교수
이중원 성균관대 건축학과 교수
이중원 성균관대 건축학과 교수
가을이다. 하늘이 높고 푸르다. 또 나무마다 단풍이 짙다. 가을을 더 가을답게 체험하기 위해 선인들이 정자에 올랐다면, 우리도 어디에 오를 필요가 있다. 어디에 올라야 할까. 여러 곳이 있을 수 있지만, 프랑스 건축가 로랑 보두앵이 디자인한 ‘이응노미술관’(대전 서구 둔산대로)도 그중 하나다.

이곳은 전통 건축의 현대화를 모색하고 있다는 점에서 각별하고, 또 프랑스 건축가가 국내에 세운 ‘원조 코르뷔지앙(Corbusian· 근대 건축의 거장 르코르뷔지에 추종자들)’ 건축이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무엇이 그렇게 남다른가.

첫째, 지붕이다. 흔치 않은 지붕 모습이다. 어떻게 보면 한옥의 창살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한옥의 서까래 같기도 하다. 창살처럼 빛을 여과하고, 서까래처럼 구조재의 반복미가 있다. 지붕 격자보의 단면들은 막대기 자를 옆으로 세운 것 같은 기다란 직사각형이다. 보의 춤(높이)은 1.6m에 육박한다. 이는 보와 보 사이의 간격인 1.2m보다 크다. 그 결과 태양빛이 바로 투과하지 못하고 여과된다. 간접광이 필요한 미술관에서는 안성맞춤이다. 또 앞치마처럼 테두리 보(골조 경계에서 잡아주는 보)가 격자보의 상단은 가리고 하단은 가리지 않았다. 보의 춤이 만드는 그림자 효과가 격자보를 더 드라마틱하게 만든다.

둘째, 벽이다. 특히, 이 미술관을 동서로 관통하는 긴 벽이다. 이 벽은 지붕 격자보를 지지하면서 동시에 전시실을 남북으로 나눈다. 남측 전시실은 단층이라 천장고가 높고 밝으며, 북측 전시실은 중층이라 천장고가 낮고 어둡다. 이는 다양한 매체를 가로지른 고암 이응노의 회화와 도자, 조각 세계와 만나려는 건축가의 시도이기도 하다.

이 긴 벽은 서측 시작점에서 두 그루의 소나무와 더불어 근사한 입구 영역을 만들고, 동측 끝점에서 인공 풀과 더불어 조경 영역을 만든다. 특히 끝점에서 벽을 지면에서 띄운 길이가 상당한데 이 점을 건축가는 저녁에도 강조하고 싶었는지 바닥 조명을 벽 앞뒤로 설치했다.

여기뿐만 아니라 건축가는 격자보 끝단 바닥에도 조명을 심었다. 사실 이 미술관 주변에 설치한 바닥 조명들이 무엇을 밝히고 있는가를 하나하나 꼼꼼히 보는 것은 보두앵의 생각의 궤적을 엿볼 수 있는 이 미술관만이 줄 수 있는 또 다른 재미다.

셋째는 기둥이다. 보두앵은 네오 코르뷔지앙 건축가다. 먼저 입구 기둥을 보자. 보통 보라고 하면 사람이 앞으로 나란히 자세를 했을 때의 팔처럼 몸 앞에 있지 머리 위에 있지는 않다. 그런데 여기서는 격자보를 기둥머리 위에 얹었다. 별것 아닌 것 같은 한 수인데 사실은 별것이다. 이 한 수로 기둥은 경쾌함을, 지붕은 가뿐함을, 벽은 가벼움을 얻는다. 그 덕분에 기둥과 지붕 격자보와 벽이 잠긴 관계가 아니라 풀린 관계가 된다.

다음은 로비 기둥을 보자. 로비 기둥은 창에서 안쪽으로 들어와 있는데 건축가는 기둥의 상단부를 흰 석고벽으로 가렸다. 상단벽을 기둥 앞에 두어 기둥을 유리벽과 석고벽 사이에서 흐르게 했다. 입구 기둥과 로비 기둥의 처리로 건물은 가벼워 보이고, 공간은 흐른다. 전형적인 코르뷔지앙 건축가들의 기둥 사용법이다.

마지막은 빛이다. 르코르뷔지에는 “건축은 빛 아래에 볼륨들을 정확하고 장엄하게 모으는 작업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보두앵은 이를 교본으로 삼고 있다. 지붕에서, 전시실 내부 나무 차양 장치에서, 유리 표면에서, 수면에서, 또 벽면에서 보여준다. 사실 빛은 늘 변하기 때문에 한순간을 포착해 묘사하기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 순간적인 조건이 맛이기도 하다.

고암의 예술 세계와 보두앵의 건축 세계가 만나 사람의 정신을 고양시키고 가을 체험을 드높인다. 지붕과 벽과 기둥이 빛의 갈래를 나누고, 빛의 결을 일으킨다. 빛이 춤을 추니, 그림자가 춤을 춘다. 가을 창공이 더 맑아 보이고, 가을 단풍이 더 물들어 보이는 이유다. 이 가을을 한층 밀도 있게 누리고 싶다면, 이응노미술관에 그 기대를 걸어보자.

이중원 성균관대 건축학과 교수
#이응노미술관#전통 건축#근대 건축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