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머리로 대화하기보다 가슴으로 접근해야 한다[광화문에서/박형준]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0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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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준 도쿄 특파원
박형준 도쿄 특파원
11일 일본 도쿄 중의원회관에서 부흥담당 부대신 간케 이치로(菅家一朗) 의원을 만났다. 이달 초 후쿠시마 제1원전을 취재한 인연으로 후쿠시마현 출신인 그를 만났다.

도시락을 먹으며 1시간여 동안 원전 이야기를 나눴다. 일어서려는데 간케 의원이 갑자기 “제 안경 어떻습니까”라고 물었다. 주일 한국대사관 인사들과 만났더니 거의 예외 없이 테가 둥근 안경을 착용했다는 것을 기억했다고 한다. 한국 기자를 만나는 자리인 만큼 평상시 사용하는 각진 테 대신 둥근 테 안경을 썼다고 했다. 작지만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 씀씀이가 느껴졌다. 한일 갈등이 첨예화되면서 ‘배려’라는 단어가 무척 낯설어졌다. 하지만 상대방을 배려한 과거 사례들은 꽤 많다.

일본 보수의 원류로 꼽히는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씨는 1982년 총리가 되고 나서 다음 해 1월 첫 해외 방문지로 한국을 선택했다. 일본 총리의 한국 방문 자체가 처음이었다. 소노다 스나오(園田直) 당시 외상이 “한국은 싫어하는 상대(일본)에게 돈 빌려가는 관습이라도 있나”라고 망언을 했고 교과서 문제도 불거져 한일 관계가 나쁠 때였다.

나카소네 전 총리는 2010년 ‘보수의 유언’이라는 책에서 “한국인들의 표정이 상당히 굳어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분위기가 바뀌는 순간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NHK 한글 강좌를 시청하며 틈틈이 공부한 한국어로 만찬회 인사말의 4분의 1가량을 했다. 전원이 기립 박수를 쳤다고 한다. 그는 “한국 방문은 대성공이었다”고 전했다. 그 후 한국 정부도 반일 감정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강경 매파였던 나카소네 전 총리는 1985년 야스쿠니신사에 공식 참배했으나 한국 등의 반발에 단 한 번으로 그만뒀다.

지한파 언론인 와카미야 요시부미(若宮啓文) 전 아사히신문 주필은 한 칼럼에서 김재순 전 국회의장의 일화를 소개했다. 1990년 국회의장 시절 방일해 와카미야 전 주필에게 “일본의 장래 총리 후보들을 만나고 싶다”고 요청했다. 그런데 당시 주일 한국대사관의 공사가 찾아와 만남을 중단시키려 했다. 국회의장이 일본 의원 사무실을 돌면 한국의 체면이 서지 않는다는 취지였다. 그러자 김 의장이 몹시 꾸짖으며 “내가 면담을 신청한 것이니 방문하는 것은 당연하다. 한일 관계 미래를 위해서라면 나는 한신(중국 한나라 장군)처럼 남의 가랑이 밑을 기는 일이라도 할 것이다”고 말했다. 이 장면을 본 와카미야 전 주필은 김 의장의 ‘왕팬’이 됐다고 고백했다. 와카미야 전 주필은 평생 한국 입장을 이해하고, 한일 관계 개선을 호소하는 칼럼을 썼다. 김 전 의장의 대범한 모습이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22일 이낙연 총리가 취임 후 처음 방일했다. 일본 언론은 ‘지일파 한국 총리가 온다’며 기대감을 나타냈다. 24일 이 총리와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가슴’으로 대화하길 기원한다. “외교의 중심점은 양국 수뇌가 정말로 우정을 느끼고 굳게 악수하는 것이다. 서로 우정을 느낄 수 있도록 상대의 입장도 존중하고 이쪽 입장도 존중받는 방식이 돼야 한다”는 나카소네 전 총리의 말(2006년 10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처럼.

박형준 도쿄 특파원 lovesong@donga.com
#이낙연 총리#아베#일본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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