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폐허를 본다는 것은[김영민의 본다는 것은]
더보기

폐허를 본다는 것은[김영민의 본다는 것은]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입력 2019-09-30 03:00수정 2019-09-30 03:25
뉴스듣기프린트
트랜드뉴스 보기
<4> 무너진 일상
※이 기사에는 영화 ‘벌새’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성수대교 붕괴 사건과 일상에 드리운 황폐함을 다룬 영화 ‘벌새’의 한 장면. 엣나인필름 제공
‘벌새’ 포스터. 엣나인필름 제공
공권력은 폐허를 감춘다. 폭력과 재난이 발생한 곳의 삶은 폐허일 수밖에 없지만, 공권력의 화장술은 폐허의 사금파리들을 시야에서 흔적도 없이 치워버린다. 공권력이 폐허를 가리고 덮어 사람들의 망각을 부추길 때, 예술가들은 사람들에게 폐허를 애써 상기시킨다. 영화 ‘벌새’ 역시 그런 폐허로의 초대이다. 1994년 10월 21일, 한강에 위치한 성수대교의 상부 트러스가 무너져, 총 49명의 사상자를 낸다. 오늘날 말끔해진 성수대교를 달리는 차량 운전자 중에 1994년의 폐허를 상상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 영화 벌새는 폐허가 된 과거의 성수대교 앞으로 관객들을 초대한다.

상영 시간 내내 벌새는 한국의 건물이나 교량 안전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말하지 않는다. 벌새는 성수대교 붕괴와 같은 어처구니없는 비극이 왜 일어나야만 했는지를 탐구하지 않는다. 그 대신 우리가 살아온 일상이 일견 깔끔해 보여도 사실 폐허임을 꼼꼼히 증명한다. 상처받은 자존심으로 일그러진 가장, 폭력으로 얼룩진 남매, 거짓과 관성 속에서 나날을 이어가는 부부, 원래 교육 목표로부터 한참이나 멀어진 학교, 그 모든 삶의 국면에서 버티고 있는 사람들 표정마저 모두 폐허임을 상기시키는 긴 여정을 거쳐, 성수대교는 비로소 무너진다. 그리하여 관객들은 성수대교가 하나의 부실한 물리적 구조물에 그치는 게 아니라 우리 삶 전체를 상징하는 폐허임을 납득하게 된다. 벌새를 본다는 것은 이 사회가 폐허가 되는 과정을 추적하는 일이 아니라, 이미 폐허였는데, 아 폐허였구나라고 새삼 깨치는 과정에 가깝다.

벌새의 세계에 희망이 있다면, 이 폐허의 흔적을 서둘러 치우기 때문이 아니라, 폐허의 주인공들이 스스로 폐허를 보러 가기 때문이다. 성수대교 붕괴로 인해, 벌새의 주인공 은희의 언니는 학교 친구들을 잃고, 은희는 유일하게 의지했던 사람인 한문학원 영지 선생님을 잃는다. 선생님이 아직 이 세상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때, 은희는 선생님께 물은 적이 있다. “자신이 싫어질 때도 있나요?” 선생님은 말했었다. “자신을 좋아하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리는 것 같아. 내 자신이 싫어질 때면, 그러는 내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봐.”

어느 날 은희는 가정폭력의 여파로 깨져 나갔던 스탠드 조각을 우연히 발견하게 된다. 폭력의 흔적은 깨끗이 치워진 줄 알았건만 유리 조각은 소파 밑에 남아 과거의 재난을 증거한다. 그제야 폐허는 당장 보이지 않아도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는 섭리를 받아들인 양, 은희는 성수대교를 보러 간다.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선생님을 어느 날 예고 없이 수장시킨 그 폐허를 스스로 보러 나선다. 새벽에 한강으로 달려간 은희, 은희의 언니, 언니의 남자친구는 동이 터오는 어스름 무렵 무너진 성수대교를 침묵 속에 바라본다. 그때 성수대교는 곧 치워져야 할 잔해가 아니라 스스로 폐허를 찾아온 이들을 위한 묵상의 대상이 된다.


부서진 성수대교는 말한다. 삶은 온전하지 않다고, 이 세상에 온전한 것은 없다고, 과거에 무엇인가 돌이킬 수 없이 부서져 버렸다고, 현재는 상처 없이 주어진 말끔한 시간이 아니라, 부서진 과거의 잔해라고, 그러나 그 현재에 누군가 살고 있다고, 폐허를 돌이킬 수는 없으나 폐허를 응시할 수는 있다고, 폐허를 응시했을 때 인간은 관성으로부터 벗어나 간신히 한 뼘 더 성장할지 모른다고, 성장이란 폐허 속에서도 완전히 무너지지 않은 채 폐허를 바라볼 수 있게 되는 일이라고. 마치 제발트(Winfried Georg Sebald)의 소설이 그러한 것처럼, 벌새는 우리를 폐허 속으로 데려가고, 그 폐허 속에서 우리는 영지 선생님이 태우는 담배 연기처럼 고양된다.

주요기사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성수대교 붕괴 사건#벌새#폐허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기사 의견

   

주요뉴스

1/3이전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