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중소기업인들[오늘과 내일/하임숙]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9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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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정점 지난 채 맞은 4차 산업혁명
‘공정’의 얼굴을 한 ‘때리기’ 규제론 공멸

하임숙 산업1부장
하임숙 산업1부장
“정치가 정책을 너무 쉽게 바꾸고, 그게 기업에 너무 큰 영향을 미쳐 깜짝 놀라고 있어요. 경영환경을 급속도로 바꾸는 일은 제발 안 했으면 좋겠어요.”

경남 창원시에서 자동차 부품 회사를 경영하는 한 기업인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그는 경영인으로 12년간 일하는 동안 이렇게 기업을 옥죄고 규제해서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법이 쏟아진 시기가 없었던 것 같다고 했다. 화학물질관리법(화관법), 화학물질 등록 및 평가법(화평법) 등 환경 규제와 산업안전 규제 때문에 대기업뿐만 아니라 중소기업까지 비용 부담, 형사처벌 부담이 너무 크다는 것이다.

26일부터 열리는 정기국회에서 정부와 여당이 ‘경제활성화법안’을 잔뜩 마련했고 그중에는 상생법, 유통산업발전법처럼 대기업을 벌주거나 규제하고 중소기업에 힘을 실어주는 법안이 다수 있다고 했더니 그는 아예 손을 내저었다. “우리나라 중소기업은 대기업이 활성화돼야 먹고사는 협력업체가 많다. 대기업이 위축될 경우 중소기업 물량이 줄어들면 줄어들었지 뭐가 도움이 되겠나”라는 거였다. “안 그래도 경기가 꺾여 매출이 줄고 있는 데다 최저임금 부담으로 작년부터 회사는 적자로 돌아섰어요. 기존 규제로도 언제 회사 문을 닫아야 할지 모르는데 여기에다 경제 활성화라는 명목으로 더 규제하겠다니요.”

한 공작기계 제조업체 최고경영자는 더 심각한 이야기를 했다. 이 회사가 만든 제품을 판매하는 대리점 사장 중 몇몇이 최근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것이다. 공작기계 제품은 판매 단위가 3000만∼수억 원이어서 대리점들은 일단 할부로 사서 갚아나가는 방식으로 영업을 한다고 했다. 그런데 불황으로 고객이 줄어든 상황에서 최저임금의 급격한 상승은 중환자에게서 인공호흡기를 떼는 것과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처음엔 직원을 내보내고 부부가 밤새워 일했지만 대리점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기계를 중고로라도 팔고 나가려 했지만 팔리지 않은 채 할부금 부담이 꼬박꼬박 돌아왔다. 빚을 추가로 낼 수도 없었지만, 빚을 낸다는 건 그래도 잠깐의 위기만 넘기면 되리라는 희망이 있을 때나 할 수 있는 행위였다.

이 제조업체 대표는 “진짜로 중소기업을 돕고 경제를 살리고 싶으면 정부 여당이 아무것도 안 하면 좋겠다”고 했다.

20대 마지막 국회에서 일 좀 해보겠다는 정치권에 중소기업인들은 “제발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상생을 통해 경제를 살리자는 정치권이 언제 한 번이라도 현장에 와서 중소기업인들의 절절한 목소리를 들어봤느냐고도 했다.

산업계가 어려움에 처한 건 모두 정책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미 글로벌 경제가 ‘한동안 가보지 않은 길’에 들어섰기에 우리 기업들이 혼돈을 겪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무역장벽이 다시 높아지고, 세계에서 가장 크고 센 두 나라가 대립하며,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등에서 한 발짝 앞서지 않으면 도태되는 4차 산업혁명은 구호가 아닌 현실이 됐다. 여기에다 한국의 경기가 이미 2년 전에 정점을 지났으니 기존 질서에 발 빠르게 적응해 글로벌 톱 기업을 몇 개 배출한 적 있는 한국이라도 생존을 보장받긴 힘들게 됐다.

그렇기 때문에 잘못된 정책은 그 많은 요소 중 하나일지 모르지만, 기진맥진하는 기업들의 숨통을 끊어놓을 마지막 한 수가 될 수도 있다. 어느 중소기업 대표는 “최저임금을 2년 전으로 되돌리고, 경기가 살아날 때까지만이라도 각종 규제를 원상복구하지 않으면 이대로 우리 제조업은 침몰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공정’의 얼굴을 한 규제론 공멸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하임숙 산업1부장 artemes@donga.com
#중소기업#4차 산업혁명#경제활성화법안#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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