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신의 늪[정도언의 마음의 지도]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9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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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
가끔 확신(確信)에 찬 사람이 부럽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오해는 마십시오.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은 아니니까요. 정신분석가로서 수련을 받아서인지 생각하는 틀이 너무 복합적이어서 어떤 일에 대해 신념에 찬, 명명백백한 의견을 가지기 어렵습니다. 복잡한 제 생각에 비하면 뚜렷한 확신은 멋있게, 진실에 가까울 것같이 보입니다. 확신에 찬 사람을 대하면 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까, 정말 궁금해집니다.

마음의 스크린에는 늘 두 가지 영상이 동시에 맺힌다고 합니다. 밖으로부터는 외부의 현실이 투영됩니다. 안으로부터는 그간의 경험을 통해 마음 안에 쌓여 있던 것들을 소환해 투영합니다. 동시에 밖과 안에서 스크린에 맺힌 이미지들이 통합되어 생각, 느낌, 그리고 의견이 만들어집니다. 그러니 마음의 흐름은 주관의 영향이 주도하며 순도 100%의 객관적 진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음은 환상과 현실의 상호작용에 따른 결과물입니다. 현실은 환상에 영향을 주고, 환상은 지각된 현실의 모습을 수정하며, 마음의 방어기제들, 합리화, 부정(否定), 투사 등등이 작용해 생각, 느낌, 의견이 최종적인 모습을 갖춥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수년 전에 유럽에 강연을 갔습니다. 오래전 일이나 그 도시에 대한 인상은 아직도 매우 부정적입니다. 도착 당일 호텔 앞에서 눈 뜨고 소매치기를 당했기 때문입니다. 초청해준 분들의 환대와 여러 박물관, 미술관 전시품들에서 받은 감명이 부정적인 감정을 상당히 순화시켜 주었음에도 그렇습니다. 출발 전 가졌던 환상의 이미지는 재상영관의 화면처럼 비가 내리고, 현실의 실망스러움은 확장, 확대되어 제 마음의 스크린에 박혔습니다. 그 도시에 대한 제 마음은 앞으로도 경험, 트라우마, 기억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제가 지닌 부정적 의견은 문화 대국의 수도라는 객관적인 지표와는 완전히 분리된, 별도의 것입니다.

마음은 결코 단순하게 움직이지 않습니다. 마음은 늘 멈추지 않고 복잡하게 흘러갑니다. 누가 누구에게 어떤 마음에서 그랬느냐고 물어봐서 대답이 명쾌하다고 해도 그 질문과 그 대답 모두 시작부터 완전체가 아닌 결핍된, 부족한 것들입니다. 질문하는 사람, 대답하는 사람 모두가 확신을 가지고 있다면 문제는 더욱 심각합니다. 확신의 늪은 항상 깊고 어둡습니다. 들여다보아도 제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애를 써야 겨우 일부가 보일 뿐입니다. 잘 보이지 않으면 객관적인 이해보다는 주관적인 느낌이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고 힘을 씁니다. 느낌만으로는 이해가 안 돼 마음이 불편해진 사람들은 확신이라는 방법으로 대처하려 합니다. 세상의 불확실성이 늘어날수록 확신에 찬 사람들도 늘어납니다.

확신이 돌같이 굳어지면 소신(所信)이 됩니다. 한 번 굳어진 소신을 녹여내서 굽히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소신을 굽히려는 순간 소신뿐 아니라 자아 정체성 전체가 흔들릴 것 같은 위기감이 들기 때문입니다. 자아 정체성이란 “나는 누구이며 나와 세상의 관계는 어떠한가?”에 관해 스스로 지닌 생각입니다. 개인의 정체성뿐 아니라 집단문화의 힘도 소신의 ‘갑옷’으로 작용합니다. 소신을 굽히면 모두의 비난을 받게 됩니다. 어느 쪽에서는 잘못을 인정한 것으로, 다른 쪽에서는 배신자로 낙인찍힙니다. 합리적인 융통성을 발휘했다고 평가받는다면 대단히 예외적입니다. 지나친 확신이었거나 잘못된 소신이었다면 당연히 고치고 굽혀야 하지만 거의 불가능합니다. 어차피 그러하다면 끝까지 가야만 합니다.

세상을 합리적으로 사는 힘, 현실 판단력은 객관과 주관을 구분하는 힘입니다. 현실 판단력의 아킬레스건은 왜곡된 기억, 트라우마, 본능적 욕구, 갈등 같은 주관의 영향을 받는다는 점입니다. 교묘한 말로 객관으로 위장해 주장할 수는 있겠으나 기반은 주관입니다. 이론의 여지가 전혀 없어 보이는 확신조차도 반복적인 검증의 대상이 돼야 하는 이유입니다. 대면하고 수정, 보완해야 하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굳혀 놓은 확신에 금이 가는 것을 두려워할 뿐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그 확신을 지켜야만 합니다. 확신의 순도를 의심하며 고민하기보다는 쉽게 고개를 돌려 버립니다. 확신이 소신의 경지에 도달하면 지키기 위한 노력은 극도에 달합니다. 확신과 소신 모두 꾸준한 검증, 수정, 보완의 대상이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절대적인 진실로 여기게 되면 고집이 될 뿐입니다.

현실 인식력은 내적 성찰을 통해 주관의 영향을 줄이고 객관의 역할을 더 존중함으로써 건강해집니다. 바깥만 쳐다보지 말고 마음의 안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본질이 흔들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확신과 소신의 모습만을 고집하는 세상은 같이 만들어 나가는 세상이 아닐 겁니다. 진정한 명의(名醫)는 환자에게 내린 자신의 진단이 틀렸을 가능성을 의심하고 또 의심합니다. 확신에 찬 의사는 주변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고집하다가 의료 사고를 낼 가능성이 큽니다. 보고는 있는데 보지 못하고 있다면? 아니면 아예 볼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면? 세상을 고치는 의사를 대의(大醫)라고 합니다.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
#확신#합리화#부정#소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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