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G-AI 선점”… 글로벌 패권 전쟁터 된 테크시장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8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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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흔들리는 ‘IT 분업’

최근 국내외 주요 테크 기업들이 국가 간 패권전쟁을 피해 공급망 점검 및 조정에 나서고 있다. 미중 무역전쟁, 일본의 수출 규제 등 기존 글로벌 분업 체계를 흔드는 지정학적 리스크가 장기화될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18일 전자업계에 따르면 대표 기업인 삼성전자, 애플, 화웨이는 이미 밸류체인(가치사슬) 조정에 나섰다. 애플은 생산기지의 탈중국, 화웨이는 기술의 탈미국을 진행하며 ‘아군’을 찾는 중이다. 미중 무역 분쟁에 있어 적극적인 대응을 자제했던 삼성은 최근 일본 수출 규제로 불확실성이 커지자 전사적으로 1∼4차 협력사까지 밸류체인을 따져보며 공급처 다변화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국내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최근까지 이어지고 있는 일본의 한국 수출 규제에 대해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설계를 독점하는 ARM, 모바일 운영체제(OS) 시장의 70%를 차지하는 구글이 중국 화웨이 제재에 동참했을 때 그럴 수도 있구나 했는데, 비슷한 일이 한국 기업에도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계기가 됐다”며 “어제의 파트너가 국가 간 이해관계에 따라 치명적 리스크가 될 수 있다는 의미라 공급망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 흔들리는 기존 질서

지난달 인도네시아 바탐에 대만 전자업체이자 애플의 주요 협력사인 페가트론의 공장 개장식이 열렸다. 중국 상하이 등에서 생산해 온 페가트론이 동남아시아에 공장을 세운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또 다른 애플 협력사 폭스콘은 최근 인도에 생산시설을 확대 중이다.

로스앤젤레스타임스는 15일(현지 시간) ‘무역전쟁이 테크 제조사를 미중 진영 둘로 가르고 있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페가트론의 인도네시아 공장 설립은 미중 무역 분쟁으로 인한 전자 제조사들의 근본적인 생산기지 변화를 대표하는 사례”라고 분석했다.

애플은 생산기지의 ‘탈중국’뿐만 아니라 ‘핵심 기술의 내재화’에도 나서고 있다. 주요 기술은 직접 만들겠다는 것이다.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인텔의 모뎀 사업을 인수한 뒤 “아이폰의 핵심 기술을 컨트롤하고 개발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쿡 CEO는 꾸준히 핵심 기술 내재화를 주장해 왔지만 최근 글로벌 무역 분쟁에 따른 불확실성에 대응하기 위해 이 같은 전략에 더욱 속도를 내고 있다고 블룸버그 등 주요 외신들은 분석한다.

화웨이도 기술의 ‘탈미국’을 위해 애쓰고 있다. 이달 9일 화웨이 개발자 대회에서 자체 OS인 ‘하모니 OS’를 처음 공개하고, 스마트TV에 이를 적용하겠다고 밝혔다. AP 설계는 자사의 팹리스 자회사인 하이실리콘을 통해 어떻게든 해보겠다는 전략이다.

테크 기업의 공급망 변화는 ‘기술(미국)-소재(일본)-반도체 및 디스플레이(한국)-조립(중국)’으로 이어지는 기존 분업 체계가 흔들리고 있다는 의미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단시간에 대체는 불가능하지만 시도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몰렸기 때문이다.

보스턴컨설팅그룹은 최근 보고서에서 “미중 무역 협상이 어떻게 진행되든지 지정학적 긴장은 계속될 것이다. 테크 산업의 무역 질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 패권 전쟁터 된 테크 시장

특히 테크 기업이 공급망 재편에 나선 까닭은 테크 시장이 세계 정치 지형의 갈등이 표출되는 ‘대리 전쟁터’ 양상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수출 규제, 1년째 이어진 미중 무역전쟁과 5세대(5G) 통신 패권전, 프랑스의 반구글 전선, 러시아의 애플 반독점 조사 등 테크 기업은 곳곳에서 각종 갈등 상황에 휩싸인 상태다.

전문가들은 글로벌 테크 시장이 5G 상용화를 기반으로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자율주행 등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기를 맞고 있는 상황이 자국 중심주의와 맞물려 패권 전쟁터가 됐다고 보고 있다. 기존 컴퓨터, 스마트폰 위주의 시장은 글로벌 분업 구조로 여러 나라가 수혜를 볼 수 있었지만 5G 시대는 플랫폼을 선점한 소수가 독점할 가능성이 높다.

안진영 SK증권 연구원은 “세계 경제 패러다임이 바뀌면서 독일 인더스트리4.0, 일본 소사이어티5.0, 한국 8대 신성장동력 등 주요 국가 미래 산업 전략이 모두 정보통신기술(ICT)과 AI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며 “플랫폼을 누가 선점하느냐에 미래 먹거리가 달려 있어 국가마다 사활을 걸 수밖에 없고, 상대가 치면 아픈 분야”라고 말했다.

미중 무역 분쟁과 성격은 다르지만 지난달 프랑스가 구글 등에 대한 디지털세 부과 법안을 상원에서 의결한 것도 미국의 데이터 독점에 대한 불안 요인이 한몫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프랑스를 글로벌 투자 거점지로 두고 있는 이해진 네이버 글로벌투자책임자(GIO)는 6월 한 심포지엄에서 “(구글) 제국주의에 대항하려면 연합군이 필요하다”고 언급한 바 있다.

자유무역 속에서 급성장한 한국 기업의 고민은 커질 수밖에 없다. 지난달 LG그룹의 임원 대상 포럼 주제가 ‘미중 무역전쟁’이었다. 19일 열리는 SK그룹 ‘이천포럼’의 주요 주제도 AI와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위기 등이다. 재계 관계자는 “중국, 일본, 미국 모두 중요한 파트너”라며 “기술·통상 패러다임의 동시 전환은 수출 위주의 한국 기업에 위기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허윤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안보와 경제가 분리됐던 시기는 인류 역사상 최근 30년밖에 안 된다”며 “안보와 경제를 함께 생각하며 전략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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