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의 시대, 납량의 계절[임희윤 기자의 죽기전 멜로디]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8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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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6집 ‘We Are Not Your Kind’를 낸 미국의 헤비메탈 밴드 ‘슬립낫’. 가면 뒤 진짜 얼굴은 꽤 선량하다. 슬립낫 페이스북
9일 6집 ‘We Are Not Your Kind’를 낸 미국의 헤비메탈 밴드 ‘슬립낫’. 가면 뒤 진짜 얼굴은 꽤 선량하다. 슬립낫 페이스북
12일(현지 시간) 브라질 산타카타리나주에서 이상한 은행 강도 미수 사건이 발생했다. 얼굴부터 가슴까지 정교한 실리콘 가면을 뒤집어쓴 탓에 용의자는 영락없이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처럼 보였다. 잡고 보니 아니었다. 가면을 벗은 그는 얼굴도, 권총도 가짜인 전직 은행원.

3일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감옥에서 73년형을 살던 마약밀매범이 기상천외한 탈주극을 시도한 것. 면회 온 19세 딸을 옥에 두고 자신이 딸 행세를 해 빠져나오려던 계획에 필수품은 역시 실리콘 가면이었다. 그의 긴장한 모습에 교도관이 의심을 품지 않았다면 탈옥에 성공할 뻔했다. 실패 뒤 독방에 투옥된 이튿날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가면 탈옥’도 안 먹힌다면 탈출이란 이번 생에 ‘미션 임파서블’이라 생각했을지 모르겠다.

임희윤 기자
임희윤 기자
#1. 영화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의 핵심은 실리콘 가면이었다. 주인공이나 스토리보다 더 강력한 소품. 때로 사건이 싱겁게 해결돼도, 파국으로 치달아도 반전이 기다리니까. 핵심인물이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는 순간에 나도 몰래 튀어나온 한마디, “아뿔싸, 또…!”는 영화 속에서 현실이 됐다.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자막이 올라갈 때까지.

#2. 변신은 공중전화 안에서만 이뤄지는 게 아니다. 안경 벗고 드레스처럼 우아한 망토 하나 걸친다고 하늘을 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음악계에도 변태적 슈퍼맨, 가면 중독자들이 있다. KFC 치킨 양동이를 뒤집어쓰고 전기기타 속주를 뿜어내는 미국의 ‘버킷헤드’(본명 브라이언 캐럴), 스튜디오 화재로 사이보그가 됐다고 주장하는 프랑스의 로봇 가면 듀오 ‘다프트 펑크’(기마뉘엘 드 오망크리스토, 토마 방갈테르), 음악 작업 하다 컴퓨터가 고장 나 본체 뚜껑을 열어보니 죽은 쥐가 있었던 데 영감을 받아 쥐 가면을 쓰고 활동하다 디즈니 미키마우스와 소송까지 붙은 캐나다 DJ 데드마우스(조엘 지머먼), ‘먹방’ 친화적 원통 가면을 쓰고 다니는 미국 인기 DJ 마시멜로(크리스토퍼 콤스톡)….

#3. 가면을 쓰면 악상이라도 나오는 걸까. 스토리만큼은 확실히 떠오르는 모양이다. 스웨덴 록 밴드 ‘고스트’의 리더 토비아스 포르게는 가면으로 정체성을 두 번 바꿨다. 그가 자임한 첫 번째 역할은 ‘파파 에메리투스’. 해골 가면 위로 교황이 쓰는 주케토 모자를 쓴 악마의 ‘안티-교황’이다. 지난해 4집을 내면서는 스스로를 추기경으로 강등했다. ‘카디널 코피아’라는 새로운 캐릭터를 맡은 것. 트위터 게시물도 고위 성직자의 칙령처럼 집필한다. 공연장 객석에는 ‘파파’나 ‘카디널’을 모방한 코스프레 성직자들이 판을 친다.

#4. 신비의 존재, 가면 음악가들을 실제로 만나본 적 있다. 일본의 인기 밴드 ‘세카이노 오와리’ 멤버인 ‘DJ 러브’. 피에로 가면과 가발로 얼굴을 완전히 가리고 다니는 이다. 2016년 만난 그는 인터뷰 내내 가면을 벗지 않았다. 7월 말이었고 더위를 잘 타는지 금세 옷이 땀에 흠뻑 젖었는데도…. 러브는 다행히 낙천적이었다. 공항 입국장에서 나올 때 열성 팬들의 사인 요청 공세를 피할 수 있어 좋다며 웃었다. 다른 멤버들이 팬들에게 열심히 화답하는 동안 민낯의 러브는 유유히 스태프에 섞여 아이스커피나 한 잔 마시러 가는 거다.

#5. 2015년 3월,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 3월의 텍사스 기온은 곧 7월의 서울 기온이었다. 세계 최대의 대중음악 박람회인 SXSW 행사장에 한국 DJ 히치하이커(최진우)가 등장했다. 온몸을 은박으로 감싸고 로봇으로 행세를 하는 게 그의 패션 콘셉트다. 행사장을 한 바퀴 돌며 전 세계 음악 관계자들의 눈길을 단박에 사로잡겠다는 게 이날 그의 각오였다. 그러나 퍼레이드는 이내 고난극으로 바뀌었다.

“오빠, 괜찮아? 잠깐 쉬었다 갈래?”

‘푸른 눈’의 관계자들이 쏟아내는 휴대전화 카메라 셔터 소리에 묻혀 한국어 속삭임이 들렸다. 히치하이커를 밀착 경호하며 실은 휴대용 선풍기 바람을 쐬어주는 스태프의 목소리. 로봇은 말도 못하고 왼손을 들어 몇 차례 내젓더니 행진을 강행했다.

#6. 미국 헤비메탈 밴드 ‘슬립낫’이 9일, 6집을 냈다. 공포영화 화면에서 그대로 튀어나온 듯 멤버 제각각 엽기적인 가면으로 유명한 팀. 5년 만의 컴백인 만큼,
업그레이드된 가면들이 음악보다 먼저 화제다. 미국 경제지 ‘포브스’는 “6집은 의심의 여지없는 걸작”이라고 썼다. 여름이 아직 한창이다. 납량의 계절 말이다.

임희윤기자 imi@donga.com
#가면 음악가#정체성#고난극#업그레이드된 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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