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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31일 밤 山 50여곳서 횃불 올라… 2500여명 군중 ‘봉화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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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31일 밤 山 50여곳서 횃불 올라… 2500여명 군중 ‘봉화시위’

아산=김지영 기자 입력 2019-08-10 03:00수정 2019-08-10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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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3·1운동 임정 100년, 2020 동아일보 창간 100년]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2부 <제68화> 충남 아산
충남 아산 선장면에 조성된 4·4만세운동기념공원. 선장면에서는 천도교도 정수길의 주도로 군덕리 시장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수형자 명부를 보면 10대부터 60대까지 전 연령층이 참여했고 선장면 돈포리, 신동리, 신덕리, 가산리 등 모든 동리 주민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을 알 수 있다. 주소와 나이를 불문하고 모든 면민들이 단결해 전개한 독립투쟁이었다. 아산=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1919년 3월 14일 충남 아산 온양면 읍내리 온양시장 장터에서 만세 함성이 울려 퍼졌다. 스물세 살 청년 현창규가 주도한 시위였다. 서울의 3·1운동에 참여했던 그는 현장에서 만난 천도교 교사 권병덕의 권유로 고향인 온양면에서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결심했다. 거사를 계획하고 준비하는 과정에 고향의 이웃 청년들이 기꺼이 동참했다.

온양장터에 모인 현창규와 청년들은 미리 준비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사람들에게 나눠주면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 자리에 있던 온양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함께 만세를 부르기 시작하자 장터에 모인 군중이 뒤따르면서 만세소리는 계속됐다. 20명 넘는 시위자가 일제 경찰에 체포됐고 혹독한 태형을 당했다.

이날 시위는 주도자가 있고 선언서가 배포되고 태극기가 등장한 전형적인 만세운동이었다. 온양면의 시위를 시작으로 아산은 12개 면 전부가 만세운동을 이어갔다. 동아일보 1949년 3월 1일자에 따르면 충남 아산의 만세운동 참여자는 1만2800명으로 충남에서 가장 많은 인원이었다.


○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울려 퍼진 만세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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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양공립보통학교(현재 온양초등학교)는 1908년 6월 온양군 관아의 객사 건물에 세워졌다. 조선시대 관아가 있던 곳이었기에 오랜 기간 고을의 중심지로서 자리매김을 하고 있었다. 이런 상징성은 3·1운동 당시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반일 의식도 컸다. 동학 농민전쟁 당시 온양 일대의 동학교도들이 붙잡혀 감옥에 갇히거나 재산을 빼앗겼고, 정부군에 의해 체포된 동학 농민군이 온양군 관아 인근에서 처형된 일도 있었다. 온천리에 있던 조선 왕실의 온양행궁이 1904년 일본 자본가들에 의해 강탈돼 여관과 목욕탕으로 전락했고 온양군 관아가 폐지됐다.(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아산시추진위원회 ‘아산 3·1운동의 역사’) 이런 일련의 일들로 인해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이 커지고 있을 때 아산에서의 첫 시위가 일어났다.

3월 11일 온양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은 학교 운동장에 모여 조선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당시 학교장이었던 구로기 요스케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만류함에 따라 학생들은 일단 자진 해산하고 귀가한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3, 4학년 학생들이 동맹 휴교를 결의하고 다음 날인 12일 장터에 모여 다시 만세를 부르기로 했다. 시위 정보를 입수한 일제 헌병대가 임시 파출소를 학교 부근에 세운 뒤 학생들을 붙잡고 때리며 시위를 막으려 애썼지만, 학생들은 망설임 없이 거사를 감행했다. 12일 오후 2시 30분 보통학교 학생들과 시민 200여 명이 온양 장터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에 나섰다. 본격적인 만세운동의 시작이었다.

아산의 만세운동은 온양장터 시위 뒤 2주 정도 소강 국면을 보이다가 3월 말부터 봉화시위로 다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봉화만세운동은 산정에서 봉화를 올려 만세를 외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3월 31일 밤 탕정면, 염치면, 배방면, 송악면 등 여러 면에서는 각 동리 산 50여 곳에서 횃불을 올리고 군중 2500여 명이 참가해 만세를 부르면서 봉화만세시위를 펼쳤다.(‘3·1운동사’) 천경석 아산시 향토문화연구회장은 “구체적인 기록이 있지는 않지만 하루에 이렇게 많은 장소에서 많은 인원이 참가했다는 것은 그만큼 정교한 계획이 있었다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 백암리 봉화시위를 주도한 김복희 열사



김복희(1901∼1986)는 3월 31일 불붙은 봉화시위에 참여한 여성 시위자였다. 아산 염치면 백암리 구미동에서 나고 자란 그는 구미동에 세워진 백암교회 안에 설립된 영신학교에서 공부했다. 백암교회를 방문한 외국인 선교사 앨리스 샤프가 총명한 김복희를 눈여겨봤고, 영신학교를 졸업한 그를 추천해 서울의 이화학당에 편입하도록 했다. 김복희는 유관순의 2년 선배가 됐다.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났던 때는 김복희가 졸업을 앞둔 즈음이었다. 총독부가 휴교령을 내리면서 김복희는 고향으로 내려가야 했다. 그는 영신학교 교사인 한연순을 만나 서울의 만세운동을 이야기하고 고향 백암리에서도 시위를 일으킬 결심을 전했다. 한연순도 뜻을 같이하고 동네 유지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계획했다. 3월 31일 밤 모든 동리민들이 횃불을 들고 동리에서 가장 높은 방화산 꼭대기에 모였다. 산상 봉화시위가 아산 일대에서 벌어진 날이었다.(‘아산 3·1운동의 역사’)

산정에 모인 주민 50여 명 중 여성은 김복희와 한연순 두 명이었다. 주민들은 봉화를 피워놓고 한마음으로 “대한독립만세”를 목청껏 불렀다. 시위 소식을 들은 온양 온천리 헌병분견대 헌병들이 총을 쏘면서 올라왔다. 주민 대부분이 그 자리에서 헌병들에게 잡혔지만 김복희와 한연순은 헌병을 피해 산을 내려왔다. 그 과정에서 어둠으로 인해 지척을 분간할 수 없어 낭떠러지 밑 돌밭에 떨어지는 사고를 당하고 두 사람 모두 큰 부상을 입는다. 김복희는 얼굴을 다쳐 피투성이가 됐을 정도였다. 헌병들은 두 사람의 상처가 아물기를 기다려 헌병대분견소로 끌고 갔다. 김복희에 따르면 백암리 봉화시위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사람은 김복희와 한연순뿐이었다. 두 여성이 시위 주도자로 파악됐기 때문이다. 김복희는 공주감옥에 수감됐고 그곳에서 유관순을 만나 함께 수감생활을 하게 된다. 감방에서 나온 뒤에도 애국과 독립에 대한 김복희의 열정은 이어졌다. 결혼한 뒤 남편을 따라 자리 잡은 경기 화성군에서 천곡교회 강습소의 교사로 활동하면서 계몽운동에 나섰다. 그보다 앞서 강습소의 교사로 일한 사람은 심훈의 장편소설 ‘상록수’의 주인공 모델이 된 최용신이었다.


○ “조선의 정의와 인도에 근거해서 행동했다”


아산의 봉화시위는 4월 2일에도 있었다. 아산에서 전개된 시위 중 가장 격렬했던 신창면 학성산의 만세운동이 이때 일어났다. 이덕균의 주도로 학성산에 모인 주민 200여 명은 봉화를 피우고 1시간여 동안 대한독립만세를 부른다. 이덕균이 “만세를 부르는 이유를 알고 있느냐”라고 묻자 군중은 모른다고 대답하고, 이덕균은 “강화회의에 임하여 한국의 독립을 운동하고 있고 이에 최근에 독립하기에 이르러서 그 때문에 나는 만세를 부르는 것”이라고 외쳤다. 그는 이어 “산 위에서 불러서는 해결되지 않으니 지금부터 가서 관청을 파괴하자”고 말했다. 산을 내려갈 때 사람들의 손에는 돌이 쥐어져 있었다. 면사무소와 주재소, 학교를 습격해 건물을 파괴하자는 이덕균의 주도에 따른 행동이었다. 면사무소를 향한 투석으로 인해 미닫이문이 부서졌고, 헌병주재소의 유리창도 깨졌다. 신창보통학교로 이동한 군중은 교정에서 독립만세를 크게 외쳤고, 학교장이 학교에서 만세를 부르지 못하게 제지하자 격렬하게 항의한다.(김진호 등 ‘한국독립운동사의 역사-국내 3·1운동’) 재판기록에 따르면 교장 무나가타는 학교 유리창 272장, 미닫이문 4장이 파괴됐다고 증언했다. 그만큼 치열했던 시위였다.

아산 3·1운동이 절정에 이른 것은 4월 4일 선장면의 만세운동이다. 선장면은 바닷가와 접한 지역이었고 장날이면 인주면, 신창면, 도고면 주민들과 인근 당진 사람들도 모여들던 곳이다. 포구에는 생선이나 해산물을 실은 배가 드나들었고 장꾼들은 이 수산물을 가져다가 장터에서 판매했다.

선장 만세운동을 이끈 인물 중 주목할 만한 사람은 정수길(1895∼1979)이다. 그는 동학농민전쟁에 참여했던 정태영의 아들이다. 일찍이 지역의 동학지도자로 주목받았던 부친을 따라 천도교에 입교한 그는 10대 때 신창의 사립학교에서 신학문을 익히면서 계몽의식에 눈떴다. 그 결과 3·1운동 당시 지역민들과 함께 독립선언을 하기로 뜻을 모으고 만세시위를 계획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4월 4일 오후 3시 선장면 군덕리 시장에 정수길과 김천봉 등 4명이 장터에 모인 군중들에게 조선독립시위운동에 함께하자고 절규한다. 200여 명의 시위대가 호응했고 곤봉을 휘두르는 주도자들을 따라 헌병주재소로 이동했다. 주재소에 도착한 군중들은 구내로 몰려가 건물과 창에 돌을 던지는 등 격렬한 시위를 펼쳤다. 만세 군중들이 해산한 것은 헌병의 발포로 시위 참가자 최병수가 목숨을 잃은 뒤였다.

선장면에 세워진 ‘기미독립무인멸왜운동 기념탑’은 선장면의 4·4만세운동을 기리고 무인멸왜기도운동을 기념하는 탑이다. 무인멸왜운동이란 1938년(무인년) 천도교에서 일제의 패망과 우리나라의 독립을 기원하면서 독립자금을 모금했던 운동을 의미한다. 선장 만세시위에 참여했던 정수길은 무인멸왜운동에도 앞장섰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돼 고문을 당했다. 선장면은 4·4만세운동기념공원을 조성하고 4월 기념동상 제막식을 갖는 등 3·1운동 100주년을 기리는 행사를 올해 초 치렀다.

김일환 순천향대 아산학연구소 연구실장은 “동아일보 기사와 김병조의 ‘한국독립운동사략’ 등의 자료를 통해 아산의 3·1운동은 충남 지역에서 가장 많은 인원이 참여한 시위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면서 “독립에 대한 아산 주민의 갈망이 얼마나 컸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선장면 4·4만세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김천봉은 재판과정에서 “나의 행위는 조선민족의 정의(正義)와 인도(人道)에 근거하여 의사 발동한 것으로 범죄가 아니다”라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김천봉의 주장은 ‘국권을 강제로 탈취당한 조선민족이 부당한 외세의 강점을 물리치고 당당히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는 인류가 추구하는 보편적 가치에 비추어 정의로운 것이고 인간의 도리에 가장 합당하다는 논리’라는 설명이다.(‘아산 3·1운동의 역사’) 이는 3·1운동에 깃든 정신이기도 하다.


아산 둔포면의 광혈이 있던 자리. 100년 전 4월 1일 광부들과 주민들이 이곳에서 광혈 파괴 시위를 전개하면서 만세운동을 벌였다.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아산시추진위원회 제공
▼ 둔포면 시위때 日人 소유 광혈 20여곳 파괴 운동

인근 천안시위 ‘5명 피살’ 소식에도日의 폭압적 진압에 정면으로 맞서

‘4월 1일 운룡리의 광산 소재지에서는 시위 군중이 횃불을 올리며 대한독립만세를 절규하고 일인(日人) 소유의 광혈(鑛穴) 20여 개소를 파괴하였다.’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가 펴낸 ‘독립운동사’에서 아산 둔포면의 3·1운동은 한 문장으로만 소개돼 있다. 하지만 이 정도로도 둔포면 시위가 갖는 특별한 의미를 전달하기엔 충분하다. 바로 대대적인 광혈(광물을 파내기 위해 땅속을 파 들어간 굴) 파괴 운동이 벌어졌다는 사실이다.

당시 둔포면 운용리 일대에는 일본인 소유의 광혈이 많았다. 금을 캐기 위한 곳들이었다. 둔포리에 거주하는 신억균 씨(73) 등에 따르면 운용리 외에도 인근 석곡·염작·신왕리 일대의 밭과 야산에 주민들이 ‘금정 구뎅이’(금점 구덩이)라 부르던 금광이 많았다.(‘아산 3·1운동의 역사’)

둔포면의 광혈 파괴 운동은 이처럼 지역적 특성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지만 일제의 폭압적 진압에 대한 정면 대응이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3월 27일과 28일에 인근 천안 직산 일대에서 금광 광부들이 중심이 된 만세운동에서 일제 헌병과 수비대의 총에 5명이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천안과 아산이 가까웠기에 이 소문이 빨리 퍼졌음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아산 3·1운동의 역사’를 공동 집필한 천경석 아산시 향토문화연구회장은 “인근 천안에서 사망자가 다수 나왔다는 소식에도 위축되지 않고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했다는 점에서 아산 광혈 시위는 주목할 만하다”고 말했다.

아산=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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