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의 공포를 진정시킨 처방[이상곤의 실록한의학]〈79〉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8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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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
계유정난 당시 너무 많은 이의 목숨을 빼앗은 때문일까. 세조와 그의 가족에겐 액운이 끊이지 않았다. 재위 3년째에는 첫째 아들 의경세자가 갑작스러운 우환으로 20세 젊은 나이에 세상을 버렸다. 재위 7년째에는 후일 예종이 되는 해양대군의 첫 번째 부인이자 한명회의 딸인 세자빈 한씨가 원자를 출산한 지 5일 만에 죽었다. 원자 또한 그 2년 후인 세조 9년 세상을 등졌다. 예종도 20세 되던 해 가벼운 감기에 걸려 비명횡사했다.

세조도 끊임없이 질병에 시달렸다. 세조는 임금이 되기 전까지 매우 건강했다. 재위 9년 9월 27일 세조는 효령대군에게 이렇게 말한다. “어릴 때는 방장한 혈기로 병을 이겼는데, 여러 해 전부터 질병이 끊어지지 않는다.” 차천로가 쓴 ‘오산설림’에는 “세조가 발로 벽을 차 넘어뜨렸다”고 한다. 한겨울에도 홑겹의 옷을 입고 옷 위로 김이 날 정도로 몸이 뜨거운 건강체였다.

실록에서 세조를 괴롭힌 질병은 스트레스성 질환인 매핵기(梅核氣)다. 매화 씨가 목을 막고 있는 듯 이물감을 느끼는 질환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증상은 목구멍이 막힌 듯해 항상 캑캑거리거나 속이 그득해 음식을 먹지 못한다. 기가 치밀어 올라 숨을 헐떡거리기도 한다. 심해지면 명치 밑과 배에 덩어리가 생기며 숨이 끊어질 듯한 발작적 통증을 느낀다.

매핵기를 치료하기 위해 세조가 복용했던 약물은 칠기탕(七氣湯)이다. 세조 12년 10월 2일의 기록이다. “임금이 신하들에게 ‘꿈에서 현호색(玄胡索)을 먹었더니 가슴과 배가 아픈 매핵기 증세가 조금 덜어졌는데 이것이 무슨 약인가?’라고 물었다. 그래서 현호색을 가미한 칠기탕을 올렸더니 과연 병환이 나았다.”

‘칠기(七氣)’는 기뻐하고(喜) 성내고(怒) 근심하고(憂) 생각하고(思) 슬퍼하고(悲) 무서워하고(恐) 놀라는(驚) 것들을 말한다. 동의보감은 이런 칠기가 서로 얽히고설키면 매핵기가 생긴다고 본다. 목의 이물감이나 원인을 알 수 없는 가슴의 답답함, 흉·복통 등 매핵기의 증상은 현대의학으로 봐도 마음과 관련이 깊다. 갱년기 장애나 고도의 빈혈, 위장장애에 의해서도 발생하지만 불안증, 신경증, 우울증, 히스테리 등 자율신경계의 고장이 더 큰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

실제 세조는 계유정난 이후 걱정과 두려움 속에 마음의 병을 앓았다. 야사(野史)들은 세조가 가족들의 줄초상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고 전한다. 자신이 죽인 원혼들의 저주에 시달렸다고도 한다. 세조가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고를 털어 오대산 상원사를 크게 중건한 것도 극도의 공포를 불심으로 이기려 한 방증이다.

세조가 복용한 현호색은 100여 년 동안 액체 소화제 시장의 최강자 자리를 지키고 있는 활명수의 주성분이기도 하다. 그만큼 칠기탕에 현호색을 더한 처방이 가슴이 막히고 답답한 증상을 치료하는 데 효험이 크다는 얘기다.

한편, 세조의 피부병과 관련해서는 실록에서 그 근거를 찾기 힘들다. 특히 단종의 생모였던 현덕왕후가 세조의 몸에 침을 뱉어 피부병이 생겼다는 이야기는 그야말로 ‘야사’다. 다만, 실록에 나온 칠기탕의 기록으로 한평생 공포의 그림자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세조의 내면을 짐작해 볼 뿐이다.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
#세조#액운#매핵기#칠기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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