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홍 칼럼]시대착오 색맹증인가, 총선책략인가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7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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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보복에의 대응은 실무적 선택 문제인데
靑 수석 등 친일·반일 이슈로 둔갑시켜
편 가르기 근저엔 국감·총선 겨냥 책략
한미일 이완 틈타 러-중 東海도발했듯
친일프레임과 총선책략에 국익 위태로워

이기홍 논설실장
이기홍 논설실장
23일은 한국 근현대 정신사의 거봉(巨峰)인 작가 최인훈의 1주기였다. 그는 1994년 소설 ‘화두’에서 인류를 커다란 공룡에 비유했다.

머리는 바야흐로 21세기를 넘보고 있는데, 꼬리 쪽은 아직도 19세기에 머물며 진흙탕과 바위산 틈바구니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짓이겨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이미지는 지금의 우리사회를 표현하는 데도 유효하다. 공룡의 머리는 다양성 다층성 상대성 자율성의 21세기인데 꼬리 쪽은 절대악과 절대선이 맞부딪치는 봉건시대, 일제 강점기에 머물러 있다.

문제는 그렇게 꼬리 쪽에서 맴돌고 있는 이들이 시정잡배가 아니라 영향력을 지닌 청와대와 집권여당 인사들이라는 점이다.

일본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의 경제 보복에 한마음으로 맞서 해결책을 찾아도 쉽지 않을 판국에 대통령민정수석과 여당 원내대표 등이 앞장서서 친일·반일 이슈로 둔갑시켜 국민을 분열시키고 있다.

일본의 경제 보복은 친일이냐 반일이냐에 따라 대응이 달라질 성격의 사안이 아니었다. 대외적으로는 강제징용 배상 문제에 대한 우리 측 안을 만들면 된다. 스펙트럼 1~10을 가정할 때 1은 한국 내 일본 전범기업 자산 압류절차를 밟으며 배상을 끝까지 요구하는 것이고, 10은 일본 측에 경제적 부담을 전혀 지우지 않는 자체배상이 될 것이다. 다양한 선택지 가운데 전략적 선택을 하면 된다.

대내적으로는 부품 자생력을 키우고 다른 공급처를 찾아 충격을 최소화하는 것인데, 여기에도 국민적 이견이 있을 여지가 없다.

설령 이완용이라해도 지금 이 이슈에 대해 별달리 친일행각을 벌일 여지가 있겠는가. 항일 무장투쟁가가 환생한다해도 불매운동 이외엔 마땅히 나설 일이 없을 것이다.

국민들 사이에 의견이 엇갈린 대목이 있었다면 그동안 문재인 정부의 대처와 준비가 올바른 것이었는지에 대한 평가다. 즉 정권의 유능·무능에 대한 논란이었는데 이를 친일·반일 논란으로 둔갑시켜 버린 것이다. 그 결과 선택지 1~10 사이의 어떤 방안을 놓고 벌이는 찬반 토론이 아닌 소모적인 친일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다른 의견에 친일 딱지를 붙이는 행태는 극우 반공 시대의 데자뷔다. 전두환 정권이 세상을 빨갱이냐 아니냐로 나눴듯, 이 정권 인사들은 친일·반일의 흑백 렌즈로만 세상을 보는 것 같다. 공룡의 머리와 몸은 21세기 초중반인데, 아직도 구한말 패러다임으로 세상을 재단하는 이들을 ‘시대지체 색맹증’이라 불러도 될 듯 하다.

그런데 과연 그게 다일까. 그들이 정말 흑백논리로 세상을 보기 때문에 그러는 걸까. 어쩌면 그들은 매우 간교한 책략가들일지 모른다. 친일 프레임은 오로지 총선 승리, 좌파 장기집권을 목표로 한 전략의 결과물일 수 있는 것이다.

일본 이슈는 올가을 국정감사의 집중력을 흩뜨리고 내년 총선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여권은 우리 대기업들이 필사적으로 뛰어 범퍼 역할을 함으로써 실물경제와 민생에 미칠 충격을 일정한 수준에서 막아준다면, 한일 분쟁은 총선에 호재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할 것이다. 국내 정치적 목적으로 한일 관계를 악화시켜 온 아베 정권 역시 칼을 꺼내 목에 겨눈 상태를 이어가는 관리 모드를 택할 가능성이 크다. 실제 찔러버리면 더 이상 남은 패가 없고 역풍도 거셀 것이기 때문이다. 한일 분쟁은 아베와 한국 여당 모두에 정략적으론 나쁘지 않은 판이다.

하지만 책략가의 계산은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항상 예기치 못했던 곳에서 책략에 묻은세균이 종기를 만든다.

22일의 중·러 동해 독도 상공 도발이 한 예다. 중·러의 도발은 1차적으로 미국을 향한 메시지인 동시에 이완된 한미일 협력의 빈틈을 찔러 더 벌리려는 것이다. 독도를 건들면 한국이 방어할 테고 그러면 일본이 발끈할 것임을 중·러는 안다.

밥 먹듯 한국방공식별구역(KADIZ)을 침범해온 중국은 이어도를 지나서 독도까지 왔다가는 걸 반복하고, 러시아는 중국의 방공식별구역까지는 안 가는 걸 묵계한 듯 독도를 기점으로 동해상 영향력을 균점하려 한다. 열강들의 태도는 19세기 말이나 마찬가지인데 집권세력이 총선 전략 차원에서 민족 프레임을 내건다면 정말로 무책임한 일이다.

안중근 의사의 고귀한 삶을 다룬 뮤지컬 영웅이 요즘 전국 순회공연중이다. 2막에서 안 의사는 이런 유언을 남긴다.

“나는 두 주먹을 쥐고 이토를 쐈지만, 아들(미래세대)의 두 손은 기도하는 손이 되길 바란다.”

투쟁의 목적은 싸움 그 자체가 아니라 평화와 번영이다. 친일·반일로 국민을 편 가르고 대(對)아베 대응 보다 내부 공격에 더 열을 올려서 무엇을 얻으려 하는 것인가. 그런 행태야말로 아베를 돕는 이적 행위나 다름없다.

이기홍 논설실장 sechepa@donga.com
#日 경제보복#강제징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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