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의 숨겨진 미덕[오늘과 내일/문권모]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7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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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외화 ‘V’의 추억 돌이켜 보면 TV는 가족 ‘놀이·대화의 장’ 역할

문권모 채널A 콘텐츠편성전략팀장
문권모 채널A 콘텐츠편성전략팀장
1985년 어느 여름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여느 날처럼 9시 뉴스가 끝난 후 ‘뭐 재미있는 게 없을까’ 하며 TV 앞에 앉았는데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인류의 친구가 되려는 외계인의 지구 방문, 전 세계 주요 도시에 나타난 거대한 우주선. 스토리와 설정은 물론 비주얼도 충격적이었다. 인두겁 아래로 도마뱀을 닮은 파충류 외계인의 실체가 드러나는 장면이라니! 외계인 지휘관 다이애나가 살아있는 쥐를 먹는 장면은 정말 압권이었다. 얼마 전 유튜브에서 찾아보니 그녀가 먹은 것은 사실 기니피그였다. 외계인들은 앵무새도 맛있게 삼켰다.

‘브이(V)’를 본 후엔 더위를 식힐 겸 가족들과 옥상에 올라가 수박을 먹곤 했다. 내가 살던 항구도시는 저녁 이후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일품이었다. 밤하늘을 바라보며 달콤한 수박을 먹으면서 가족들과 외계인, 우주선 얘기를 했다. 우리 조상들이 별을 보며 신화와 종교를 만들었듯이, 나는 TV 속 세상을 생각하며 상상과 생각의 나래를 활짝 펼칠 수 있었다.

예전엔 TV를 ‘바보상자’라고 불렀다. TV를 많이 보면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이 떨어진다는 게 그 이유였다. 지금은 누구도 TV를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방송국에서 일하는 입장이라 쑥스럽긴 하지만, 생각해 보면 TV는 나름대로 장점이 많은 매체다. 그렇지 않으면 진작 버림을 받았을 것이다. 사실 어느 매체에나 ‘어두운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문학 작품으로 추앙받는 소설도 옛날엔 잡문(雜文) 취급을 받았고, 자유로운 문체를 추구하는 작가들은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고 손가락질 받았다.

TV는 인류의 오랜 꿈이 실현된 결정체다. 인간이 도구를 만드는 이유의 상당 부분은 ‘감각의 확장’에 있다. 우리는 멀리 있는 곳의 소식을 듣고 싶어 전화를 만들었고, 먼 것을 가까이 보기 위해 망원경을 발명했다. 이런 점에서 본인의 집에 앉아 세상 모든 곳의 소식을 생생하게 보고 듣는 것은 그야말로 궁극적인 꿈이었다. 동양의 천리안과 서양의 수정구슬은 그런 소망의 상징이었다.

TV를 통해 인간은 더 많은 간접경험을 더 직접적으로 하게 됐다. 지식이 늘어나고 낯선 것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으며, 결과적으로 인류는 더 개방적으로 변하면서 톨레랑스(tolerance·관용)의 수준을 높였다. TV를 통해 보이는 다양한 인간군상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내가 TV의 큰 장점으로 생각하는 것이 또 하나 있다. 바로 ‘놀이와 대화의 장’이 되어 준다는 점이다. 놀이는 집단의 결속력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 TV가 제공하는 공통 경험은 대화의 좋은 주제가 된다.

나는 이런 점에서 가족이 함께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많이 만드는 것이 방송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책무라고 생각한다. 특히 온 가족이 스마트폰을 들고 뿔뿔이 흩어지는 요즘에는 놀이와 대화의 무대가 되는 ‘안방극장’의 역할이 더 중요할 수 있다.

요즘 프로그램은 ‘20, 30대 여성’ ‘50대 이상 남성’과 같이 타깃이 워낙 확실해 가족이 함께 볼 프로그램이 많지 않다는 지적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처럼 위대한 작품은 시대와 나이를 아우르는 특징이 있지 않은가. 내 주변엔 ‘나의 아저씨’를 보고 눈물 흘리고 ‘하트시그널’을 보고 가슴 설렜다는 아저씨도 많다. 또 최근 불고 있는 뉴트로 바람이 세대 간 이해의 폭을 넓히는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하다.

며칠 전 채널A에서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주제로 한 새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개인적으론 우리 아이들과 아빠 엄마의 옛 이야기를 함께 나눌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꼭 이 프로그램이 아니어도 좋다. 독자 여러분의 가족도 일주일에 한두 번은 안방극장 앞에 모여 훈훈한 대화를 이어가면 어떨까.
 
문권모 채널A 콘텐츠편성전략팀장 mikemoon@donga.com
#텔레비전#tv#채널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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