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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석 칼럼]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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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석 칼럼]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고미석 논설위원 입력 2019-07-10 03:00수정 2019-07-10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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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 추천 소설 ‘파친코’의 주역… 극한차별 속 존엄 지킨 재일조선인
‘상대가 저급해도 우리는 품격 있게’… 혐한-반일 격화된 韓日 시민사회
미래세대 어떤 유산 남길 것인가
고미석 논설위원
미국의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강력 추천한 소설이 있다. “첫 문장부터 사로잡는다”고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극찬한 이 작품의 제목은 ‘파친코’. 재미교포 1.5세 작가인 이민진이 2017년 발표해 그해 뉴욕타임스와 BBC ‘올해의 책’으로 선정된 이 소설은 미 애플이 드라마로도 제작한다.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로 시작하는 이 작품은 일제강점기 오사카로 건너간 재일조선인 4대의 부침을 재구성한 책이다. 강렬한 스토리텔링의 매력으로 서구권 독자에게 한일관계와 과거사를 설득력 있게 전달한 ‘값진 텍스트’로 통한다.

올해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의 주제로도 등장한 ‘파친코’의 이 첫 문장은 소설의 지향점을 보여준다. 근현대사의 격랑에 휘말린 가족이 ‘역사의 실패’로 인한 가혹한 대가를 개인적으로 치르면서도 끝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는 모습이 거기 있다. 뒤틀린 삶에 좌절하지 않고 기어코 제 발로 다시 일어선 사람들의 이야기는 인류 보편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데 손색이 없다. 이는 모든 억압에 맞서는 인간 실존, 그리고 과거 아닌 현재진행형으로 확대될 수 있어서다.

작가는 일본의 부정적 측면을 일반화하기보다 양 국민의 특질을 통찰력 있게 묘사해 묵직한 울림을 전한다. ‘너를 한 인간으로 인정해주지 않는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간다는 건 아주 용감한 일’이라거나 ‘기댈 건 우리 자신뿐이다’는 말이 그러하다. ‘조선인들은 서로 싸우고 있죠. 모두들 자기가 남보다 더 똑똑하다고 생각해요. 누가 권력을 쥐든 그 권력을 유지하려고 아주 독하게 싸울 겁니다’라는 구절은 시공을 초월하는 말로 다가온다. 나라 잃은 이들의 파란만장 여정은 인종 종교 등 이유를 끌어댄 차별 앞에 늘 속수무책으로 내던져진 사람들에게 필요한 품격과 용기를 일깨운다. 오바마 역시 자신이 겪어온 정체성의 위기와 편견 어린 시선을 되돌아보며 마음 깊이 이해하고 공감했을지 모른다.

일본의 경제 보복 조치로 양국 분위기가 급전직하 험악해지고 있다. ‘대북제재 훼손’이란 근거불명 의혹을 들고나온 이웃 나라에 한국 사회는 또 한번 분기탱천한다. 막장으로 치닫는 현실에 제동 거는 역할은 양쪽 시민사회의 몫이 되고 만다. 하지만 NHK 여론조사에 따르면 ‘정부 방침이 적절했다’(45%)는 일본 내 의견이 압도적 1위다. 그런 저쪽에 맞서 이쪽도 일사불란한 반일 대열에서 어긋난 발언이 나오면 간단히 ‘친일파’ 낙인이 찍히기 십상이다. 그럴 때마다 선택지는 그만큼 더 줄어들어 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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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정이 그렇다 해도 이젠 국제사회에서 한국은 좀 다르다는 소리를 들으면 좋겠다. 다시 ‘파친코’로 돌아가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다. 소설 말미에 죽음을 앞둔 일본인이 재일교포 4세인 솔로몬에게 이렇게 단언한다. ‘일본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솔로몬은 철석같이 믿은 일본 상사에게 배신당하고도 증오의 포로가 되지 않는다. ‘나쁜 일본인이 수백 명 있고 좋은 일본인이 한 명 있다 해도’ 진실을 왜곡하지 않는 길을 가겠다고 선택한 것이다.

그의 결기는 2016년 미셸 오바마의 연설을 떠올리게 한다. ‘저들이 저열하게 갈 때 우리는 품위 있게 가자’고 말했던 그는 지난해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부연설명 했다. “만약 그들 방식대로 경기를 하게 놔둔다면 결국 그들이 이기게 된다. 그게 그들이 원하는 바다.” 누군가 당신 욕을 할 때, 참는 것보다야 대놓고 똑같이 욕을 퍼붓는 건 참 쉽다. 그런 식으로 상대 농간에 말려든다면 이겨봐야 본전이고 상대와 똑같은 꼴 되고 마는 격인데, 그 결과로 다음 세대에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를 길게 보고 숙고하라는 의미다.

뭐든 국민 감정을 활용하면 득이 된다는 학습효과를 본 이들에게 더 이상 기대는 접는 것이 좋을 듯하다.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이대로 시민사회의 합리적 이성마저 점점 마비되면 그 연쇄반응과 파급효과는 두 나라 모두에 치명적일 터다. 그렇게 되면 누가 덕을 보게 되는가. 일본의 억지에 화나는 것은 잘못된 감정이 아니다. 다만 어떤 식으로 반응할 것인가, 과연 미래 세대에 어떤 유산을 남길 것인가. 그런 숙고가 모두에게 필요한 시점 아닐까.

혐한-반일의 장군멍군식 감정 투석전이 재발하는 악순환 속에 누구보다 좌불안석일 존재는 재일교포일 터다. 역사의 무게를 겹겹이 짊어지고 마치 지진의 단층지대와 같은 지점에 존재하는 그들이 이번에도 강한 의지로 결의를 다져주길 바랄 뿐이다. ‘그래도 상관없다’고.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
#오바마 추천 소설#파친코#일제강점기#혐한#반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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