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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터 군중에 태극기 나눠주고 “출장소 공격”… 기둥-지붕만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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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터 군중에 태극기 나눠주고 “출장소 공격”… 기둥-지붕만 남아

서천=김지영 기자 입력 2019-06-29 03:00수정 2019-06-29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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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3·1운동 임정 100년, 2020 동아일보 창간 100년]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2부 <제62화> 충남 서천
올해 3월 29일은 충남 서천군 마산면 신장리 장터에서 2000여 명이 참여한 ‘마산 신장 만세운동’이 벌어진 지 100년을 맞은 날이다. 일제에 저항하던 장꾼과 주민들의 모습을 재현한 기념행사가 이날 마산면 신장 사거리에서 열렸다. 서천의 만세운동은 타 지역에 비해 횟수는 적었지만 격렬하게 전개됐다. 서천군 제공
충남 서천 금강 하구언을 흐르는 강물은 도도했다. 길게 펼쳐진 강은 ‘서천(舒川)’이라는 지명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했다. 옛 부두에서 10여 분 걸어 내려오면 한영학교(漢英學校) 터가 있다. 지금은 개인 소유의 기와집이 자리 잡은 이곳에서 100년 전 서천의 만세운동을 이끈 젊은이들이 길러졌다.

“서천의 만세시위는 전북 군산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습니다. 금강을 사이에 두고 군산과 맞닿아 있었던 지리적 영향이 큽니다. 1919년 3월 초 군산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서천에 소식이 알려졌지요.” 21일 만난 유승광 서천지역사회연구소장은 서천에서 만세운동을 일찍이 시도할 수 있었던 분위기를 밝혔다. 1919년 3월 8일 서천군 화양면 주민 조남명이 일제 경찰에 체포된 사건에 대한 설명이었다.


○ “내가 체포된 것은 독립운동 때문”



조남명이 동리 주민 유재경을 통해 독립선언서를 구한 때는 1919년 3월 4일이었다. 3월 5일 군산에서 벌어진 호남 최초의 만세운동을 앞두고 2월 하순부터 시위를 준비한 셈이다. 조남명이 받은 독립선언서는 만세운동 기획에 한창이던 군산을 통해 전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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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남명이 동지들을 모으고 거사를 계획한 것은 군산 3·1운동이 벌어진 다음 날이었다. 조남명에 대한 재판 기록은 다음과 같다. “6일 화양면 구동리 이근호 집에 와서 동인과 한백희, 최경진에 대하여 동 선언서를 보이며 학생들은 국사를 위하여 지금 군산서에 유치되어 조사를 받고 있으니, 우리들은 이를 보고만 있을 수 없으므로 우리도 독립운동을 하자고 하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3·1운동사’)

3·1운동기념비건립위원회와 동아일보사가 세운 새장터3·1운동기념탑. 서천=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조남명과 뜻을 함께한 주민들은 만세운동에 합류하기 위해 군산을 향해 떠났다. 그러나 이들의 여정은 곧 중단됐다. 일제 경찰들에게 계획이 누설돼 체포된 탓이다. 비록 불발됐지만 화양 만세운동의 열망이 얼마나 컸는지는 기록을 통해 생생하게 전달된다. “조남명은 서천으로 압송되던 중에 서천면 삼산리의 시장 사람들에게 ‘내가 일경들에게 체포당하여 끌려가는 것은 강도나 절도로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잡혀가는 것이다’라고 외친다.”(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그는 그때껏 부르지 못했던 대한독립만세를 이 자리에서 목청껏 불렀다.


○ 2000여 명이 함께 부른 독립만세의 함성


서천군 마산면 신장리에 살던 송기면이 태극기를 제작하기 시작한 때는 1919년 3월 23일부터였다. 그는 류성렬 이근호 임학규 등 동리 사람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만세운동을 벌일 것을 논의했다. 거사일은 3월 29일 장날. 시장에 나온 군중과 함께 만세를 부른다는 계획이었다. 서천에서 벌어진 ‘마산 신장 만세운동’의 시작이었다.

서천 주민들의 의식은 무르익어 있었다. 1906년 사립학교인 한영학교가 세워진 게 계기 중 하나였다. 한영학교의 교장은 선교사 윌리엄 불(한국명 부위렴)이 맡았고 보통과 학생 10명, 고등과 학생 16명이 수학했다. “기독교 계통의 학교로 종교 교육도 했지만 강한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일본 제국주의 침략에 대항해 국권 회복을 위한 학습 내용으로 교육과정이 이뤄졌을 것으로 보인다”는 게 김진호 충남대 충청문화연구소 연구원의 설명이다.

유승광 서천지역사회연구소장이 한영학교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던 김옥준 옹에게서 들은 이야기도 이를 뒷받침한다. “학교가 달랐다. 애국가를 불렀고 운동장에서 공을 방망이로 치던 생각도 난다. 그때 교육 내용이 일본인과는 등지게 가르쳤던 것 같다”는 게 김 옹의 회고였다.(유승광, ‘서천, 서천 사람들’) 야구로 추정되는 운동을 하거나 애국가를 부르도록 했으며 일본식 교과와는 다른 내용을 가르쳤다는 증언에서, 신식 교육을 실시했고 민족의식을 기르고자 했음을 헤아릴 수 있다. 마산 신장 만세운동을 기획한 송기면 이근호 임학규 등은 20, 30대 청년으로 이곳 한영학교 출신이었다.

기독교의 영향도 컸다. 서천은 우리나라 최초의 성경 전래지이다. 1816년 서천 마량진에 표류한 영국의 함선을 통해 성경이 전해졌다. 기독교 선교사가 정식으로 입국해 선교활동을 전개하면서 1902년 서천지역에 화산교회가 세워진 것을 시작으로 인근 곳곳에 교회가 설립됐다. 이들 교회는 기독교 전파와 함께 근대 교육과 의식 보급에 기여했다. 류성렬 송기면 이근호 임학규 송여직 이동홍 등 마산 신장 만세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은 서천지역 기독교 신자들이었다.(김진호, ‘서천지역의 3·1운동’, 충남문화연구 창간호)

마산 신장 3·1운동은 치열했다. 다른 지역에선 만세운동이 여러 차례 벌어지면서 시위가 점차 공격적으로 전개되는 양상을 띠었지만 마산 신장 만세운동은 서천지역에서 처음 일어난 시위였음에도 일제와의 충돌이 거셌다. 더욱이 마산면 신장리의 장터는 서천군에서 가장 많은 물품이 거래되는 시장이었고, 강경 광천과 함께 호서지방의 3대 시장으로 불려온 곳이었다.(유승광, ‘서천 마산 신장 3·1운동과 교육적 활용’) 그만큼 큰 장이었기에 참여한 군중만 2000여 명에 달했다.


○ 공격받은 출장소는 기둥과 지붕만 남아

태극기를 가마니에 싣고 장터에 도착한 송기면 류성렬 등은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눠주었다. “我(아) 조선은 자주 독립하여 자유를 향유하고 장래의 안락을 도모한다면 어찌 기쁘지 아니하랴”라는 송여직(송기면의 형)의 연설이 장터에 울려 퍼졌다. 시장에서 독립만세를 부른다는 소식은 일제 경찰에게 이내 전달됐다. 출동한 일경이 송기면 류성렬 송여직 등을 체포하자 이근호와 나상준이 군중을 이끌고 만세를 부르면서 경찰관 출장소를 향해 행진했다. 일경은 이어 이근호와 나상준을 체포했지만 이 과정에서 군중은 더욱 늘었다. 체포되지 않은 사람들 중 고시상 이동홍 양재흥 등은 만세를 부르는 군중에게 “체포된 인사들을 탈출시키기 위해 출장소를 공격하자”라고 요청한다. 군중은 출장소에 돌을 던져 창문과 유리창을 부수고 실내로 들어가 책상과 의자 등 기물을 파손했다.(김진호 ‘서천 지역의 3·1운동’)

“고시상은 송기면 등을 체포했던 순사보를 향해 죽이겠다고 달려들었고, 정일창은 군중의 뒤편에서 출장소 파괴를 적극적으로 후원했으며 이승달은 ‘붙들려간 사람들을 구출하지 않고는 물러갈 수 없다’면서 군중을 독려했다. 출장소는 파괴되어 기둥과 지붕만 남게 되었다”(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3·1운동사’)고 기록될 만큼 마산 신장 만세운동은 격렬했다. 당시 시위자들의 형량이 대부분 징역 1년형 정도였지만 출장소를 직접 공격한 고시상 이동홍 양재흥 이승달 박재엽 등은 징역 3년에서 5년형을 선고받았다.

구금됐던 인사들이 출장소를 탈출해 군중과 함께 서천읍으로 향하던 중 군수 임익채가 말을 타고 달려왔다. “일제 헌병이 매복해 있으니 해산해 달라”는 그의 말에 군중은 격렬하게 항의했다. 이날의 시위는 여기에서 멈췄지만 군중은 다음 날 종천면 화산리에 다시 모여 만세운동을 이어갔다.

김진호 충청문화연구소 연구원은 “타 지역의 독립만세운동은 마을 단위나 면 단위의 인사들이 주도해서 전개했지만 서천의 마산신장 만세운동은 여러 면의 인사들이 한자리에서 함께 주도하고, 참여한 것이 특징”이라고 말했다. 장터에서 만세를 부르다 체포된 주요 인사들이 화양면 한산면 마산면 시초면 등 여러 면을 아우른다는 것이다. 사전에 치밀하게 시위가 기획됐다기보다는 장을 보려던 목적으로 신장을 찾았다가 시위에 참여하게 된 사람들이 운동을 주도하면서 폭발력을 갖게 된 셈이다.

신장(新場)은 새 장터라는 뜻이다. 2008년부터 해마다 이곳에서 개최돼 온 ‘마산 신장 3·1운동 기념행사’는 마산 신장 사거리에서 새장터3·1운동기념탑까지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면서 행진한다. 새장터3·1운동기념탑은 1987년 10월 3·1운동기념비건립위원회와 동아일보사가 공동으로 건립했다. 당시 건립위원회 사무국장을 맡았던 장만용 목사는 “마산 신장 3·1운동 기념행사에 해마다 참여해 왔다”며 “독립을 염원한 3·1운동의 정신이 후대에도 이어지길 기원한다”고 말했다.


▼ 전주-군산 만세운동 이끈 김인전… 서천 한영학교서 사회 첫발

日警의 표적 되자 상하이로 망명… 김구 등과 함께 한국노병회 창건


1923년 5월 13일자 동아일보에 ‘김인전 씨 장서’라는 제목의 부고가 실렸다. “상해임시정부에서 일찍이 내무차장을 지낸 김인전 씨는 12일 상해에서 이 세상을 떠났는데…”라는 내용이었다. 동아일보에는 사흘 뒤인 16일 지면을 통해 전주에서 추도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22일자 지면을 통해 추도회가 장엄하게 진행됐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만큼 주목받은 인사였다.

김인전(1876∼1923)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만세운동의 배후 지도자로 지목됐다. 당시 그가 목사로 부임한 전주 서문외교회에 모여든 학생들이 전주 3·1운동의 주축이 됐기 때문이다.

앞서 그가 평양신학교에 재학했을 때 방학 중 가르쳤던 군산 영명학교 학생들도 군산 3·1운동에 앞장섰던 터였다. 일경의 표적이 된 김인전은 국내 3·1운동의 진상을 해외에 알리고 독립운동을 계속 전개하기 위해 상하이 망명의 길을 택했다.

독립운동가 김인전이 사회활동의 첫발을 내디딘 곳이 한영학교였다. 서천에서 나고 자란 김인전은 그의 집안이 설립한 한영학교의 교사로 근무했다. “교사로서 김인전의 활동상으로 보아 그의 교육은 학생들로 하여금 민족의식을 고취하여 항일의식을 형성하는 데 초점을 맞췄을 것”이라는 게 김진호 충청문화연구소 연구원의 설명이다. 군산과 전주의 학생들은 물론이고 서천 한영학교 출신 젊은이들도 고향에서 적극적으로 만세운동에 나선 것은 김인전의 영향이 컸다는 것이다.

서천 화양면에 있는 한영학교 터. 동아일보DB·서천=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김인전은 망명 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 의장을 지냈으며 김구 등과 함께 한국노병회를 창건해 노력을 기울였다. 1923년 세상을 떠났을 때 전주에서 열린 추도회에는 800여 명이 모여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그의 생애를 기렸다.

서천=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3·1운동 100년#충남 서천#독립운동#조남명#한영학교#김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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