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기 안타 친 기분 좋은 날 ‘착한이’의 나쁜 퇴장[김배중 기자의 핫코너]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5월 28일 14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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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은퇴하겠습니다.”

26일 키움전에서 끝내기 안타를 치며 포효하던 삼성 박한이(40)는 이튿날 갑작스럽게 은퇴를 선언했다. 박수칠 때 떠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끝내기 안타를 친 기분 좋은 날 야구장 밖에서 저지른 ‘클러치 에러’ 탓이다.



술이 화근이었다. 이날 경기 후 지인들과 늦은 저녁식사를 가진 박한이는 술을 마셨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술이 덜 깬 상황에서 자녀 등교를 위해 운전대를 잡다 접촉사고를 냈다. 현장에 출동한 경찰이 음주측정을 실시한 결과 혈중알코올농도는 0.065%가 나왔다. 면허정지 수준. 정지된 건 운전면허뿐만이 아니다. 프로무대에서 20년 가까이 쌓아올린 야구선수로서의 영예, 은퇴 후 보장될 뻔 했던 ‘꽃길’도 멈춰졌다.

착한이.

자유계약선수(FA) 거품의 시대를 지켜봐온 야구팬들이라면 한번쯤 들어봤을 말이다. 2010년대 FA의 몸값이 천정부지로 치솟던 시절 박한이는 ‘삼성이 좋다는 이유로’ 2013시즌 후 4년 28억 원에 삼성과 일찌감치 계약을 마쳤다. 강민호(34)가 당시 소속팀이 롯데와 4년 75억 원, 정근우(37), 이용규(34)가 한화와 각각 70억 원, 67억 원에 계약하며 큰 부를 안은 거에 비하면 타율 3할에 세 자리 수 안타를 밥 먹듯 쳐온 박한이의 계약은 ‘헐값’이나 마찬가지였다. 경종을 울릴만한 그의 착한 계약 기려 팬들은 그에게 착한 박한이라는 의미로 ‘착한이’라는 별명을 붙여줬고 ‘까방권’(까임 방지권의 줄임말)도 부여했다.

이후 ‘하니지수’라는 것도 개발(?)돼 비 시즌 중 다른 선수들이 높은 몸값에 FA계약을 할 때마다 ‘박한이 계약의 몇 배’로 비유되며 박한이는 야구경기가 없던 날도 ‘소환’됐다. 돈에 연연 않는 그의 순애보에 팬들도 내 팀 네 팀 가리지 않고 그를 친근한 이미지로 기억해준 셈이다.

19시즌 동안 2127경기(역대 4위)를 삼성 한 팀에서 뛰며 타율 0.294, 146홈런, 2174안타(3위), 906타점, 1211득점(4위), 1028볼넷(4위) 등 역사적인 기록을 쌓아온 박한이는 이변이 없다면 삼성에서 영구결번, 지도자 연수 등이 보장될 수 있었다. 왕년의 활약으로 그가 손에 낀 한국시리즈 챔피언 반지도 무려 7개. 최근까지도 경기장 안에서 ‘노장의 품격’을 보여주는 등 선수생활 막바지까지 경기장 안팎에서 성실함으로 타의 모범이 된 그가 훗날 삼성의 사령탑이 되는 모습을 꿈꾸는 건 ‘허상’도 아니었다.

하지만 기쁜 날 들이킨 술은 영원한 ‘원 클럽 맨’을 꿈꿨던 박한이에 독(毒)이 됐고, 착한이 대신 음주운전이라는 주홍글씨가 새겨진 채 야구장에서 사라졌다. 후배들에게 20년 가까이 공들여 쌓아올린 업적, 보장된 미래도 한순간 물거품이 될 수 있다는 꽤나 섬뜩한 교훈을 남긴 채.

김배중기자 wante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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