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최재경]인연의 무게와 검사의 길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4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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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의 사건’ 특별수사단장, 채동욱·김학의와 근무 경력 시비
옛 동료 수사 달갑지 않아도 公私 구분은 공직자의 기본
인연은 인연, 수사는 수사… 분노·연민 아우르는 공정함 기대

최재경 객원논설위원·법무연수원 석좌교수
최재경 객원논설위원·법무연수원 석좌교수
살다 보면 이런저런 인연을 맺게 된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다. 길 가다 옷깃 한 번 스치는 데 500겁(劫), 같은 나라에서 태어나려면 1000겁, 하루 동안 같은 길을 동행하는 데 2000겁, 하룻밤 한 집에서 자는 데 3000겁에 걸친 전생의 인연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1겁이 ‘어떤 단위로도 계산할 수 없는 무한히 긴 시간’ 또는 ‘하늘과 땅이 한 번 개벽한 때부터 다음 개벽할 때까지의 동안’이라니 인연의 함축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귀한 것이다.

지난달 29일 대검찰청이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사건에 특별수사단을 구성하고 수사에 착수했다. 검찰 과거사위원회의 수사 권고에 따른 것이다. 단장에는 여환섭 청주지검장을 임명했다.

검찰 내부에서는 누구도 그 수사단에 가고 싶어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단장을 맡은 여 검사장의 불편한 심정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독하고 엄정한 검사로 소문난 그라도 인간적 고뇌는 컸으리라.

하지만 공직자는 국가의 명령에 따라야 하고, 직무수행에서 공사 구분은 기본이다. 여 검사장이 소회를 묻는 기자들에게 “원칙대로 수사하고 그 결과를 국민에게 소상히 밝혀 의혹이 없도록 하겠다”고 한 것은 당연한 자세다.

한데 수사단이 업무를 시작하자마자 야당에서 여 검사장의 검찰 근무 경력을 거론하면서 시비를 제기했다. 여 검사장이 2013년 김 전 차관 수사를 총괄했던 채동욱 전 검찰총장과 특별한 근무 인연이 있기 때문에 그가 하는 수사의 공정성을 믿기 어렵다는 것이다.

야당의 주장처럼 여 검사장은 채 전 총장과 서울중앙지검 및 대검 중앙수사부에서 같이 근무했다. 일부 언론의 지적대로 김 전 차관과 춘천지검에서 함께 근무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 정도의 근무 인연은 좁디좁은 조직인 대한민국 검찰에서 드물지 않다. 강직하기로 소문난 여환섭이 그런 인연 때문에 직무 잣대가 흔들릴 검사도 아니다.

우리 형사소송법은 법관에 대해 제척과 기피를 규정하고 있다. 법관이 피고인 또는 피해자와 친족 등의 관계에 있으면 직무 집행에서 제척된다. 그런 사유는 없지만 여러 가지 인연으로 불공평한 재판을 할 염려가 있으면 검사와 피고인이 기피를 신청할 수 있고 법관은 스스로 회피해야 한다.

검사에게는 이런 규정이 없다. 독립해서 직무를 수행하는 판사와 달리 상명하복이 엄격한 조직에서 검사동일체 원칙에 따라 움직이므로 개인적 인연에 좌우될 소지가 크지 않다고 본 것이다.

검사가 스스로 판단할 때 공정한 수사를 기대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다면 상급자에게 사건 재배당을 신청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 한다. 이 경우 검찰총장이나 검사장은 다른 검사에게 사건을 재배당해 처리하게 하거나 아니면 자신이 직접 처리할 수 있다. 즉, 수사 대상자와의 ‘인연’으로 생기는 문제는 검찰 내부에서 법률과 관행, 검사의 판단에 따라 해결하는 것이 원칙이다.

물론 예외는 있다. 검찰에서 이해 충돌이나 공정성 시비의 해결이 불가능하거나 국민적 우려 해소가 어려운 경우 독립적 지위를 가진 특별검사를 임명할 수 있다. ‘특별검사의 임명 등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특별검사의 수사 대상은 ‘국회가 정치적 중립성과 공정성 등을 이유로 특검 수사가 필요하다고 의결한 사건’과 ‘법무부 장관이 이해관계 충돌이나 공정성 등을 이유로 특검 수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사건’이다.

검찰에 입문해 동고동락하고 더구나 같은 검찰청, 같은 부서에서 근무한다는 것은 옷깃 한 번 스치는 것에 비해 얼마나 깊은 인연인가. 한 번 맺은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고 오래 가꿔 가려는 것은 모든 사람의 소망이다. 하지만 공직자, 특히 검사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일단 검찰이 맡아서 수사하기로 결단한 이상 인연은 인연, 수사는 수사다. 사적 인연 때문에 정의구현에 지장을 받는다면 검사로서 실격 아닌가.

검사는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 분노와 연민을 함께 가져야 한다. 단죄하는 데에만 몰두하면 혹리(酷吏)가 되고, 인간적 정리에 치우치면 법이 굽어진다. 양자를 아우르는 공정한 수사가 이루어질 것을 믿으면서 조금만 더 여유를 갖고 수사를 차분하게 지켜보면 좋겠다. 인연의 무게는 예민하게 느끼되, 그에 짓눌리지는 않기를 바란다.
 
최재경 객원논설위원·법무연수원 석좌교수
#김학의 사건#채동욱#김학의#여환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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