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하노이 결렬 후 첫 정상회담에 ‘러’ 택한 이유는?[청년이 묻고 우아한이 답하다]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3월 25일 14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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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2차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북한이 가장 먼저 러시아와 정상회담을 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습니다. 러시아와의 회담이 이루어진다면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완화에 실질적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 북미관계에는 어떤 영향을 줄 지 궁금합니다.

-김소현 부산교대 교육학과 15학번(아산서원 14기)

A. 국가안보전략연구원의 장세호 연구위원은 21일 발간된 이슈브리프를 통해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조성된 구조적 현실 때문에 북한이 최우선 정상외교 대상으로 러시아를 선택할 가능성이 크게 확장됐다”고 진단했습니다. 외교가에서도 정확히 언제 어디서 열릴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모스크바가 아닌 극동 지역 정도에서 만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장 위원이 말하는 구조적 현실의 핵심은 ‘미국의 비핵화 문제 접근법 변경’입니다. 북한의 입장에서는 지난해 6·12 싱가포르 정상회담 이후 ‘단계적 동시적’ 접근법에 미국과 공감을 이뤘는데, 이번 하노이 정상회담에서 미국이 다시 ‘일괄타결식’ 접근으로 회귀한 셈이 된 것이 사실입니다. 북한은 다음 회담에서 이 문제에 대한 교섭에 우위를 점하기 위해 자신을 지지할 우군을 확보하고 국제여론을 형성하는 것이 필수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난달 27, 28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아무런 합의 없이 회담장을 나섰다. 뉴시스
지난달 27, 28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아무런 합의 없이 회담장을 나섰다. 뉴시스
그렇다면 왜 러시아일까요. 우선 중국과 한국과의 관계개선 상황이 여의치 않은 점이 꼽힙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싱가포르 정상회담에 대한 국제여론이 빗발치자 중국이 북한을 배후 조종하고 있다는 ‘중국 배후론’을 들고 나온 바 있습니다. 다시 김정은을 베이징으로 불러들여 이런 의혹을 키운다면 현재 진행되고 있는 미중 무역협상에도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를 중국이 할 수 있습니다. 북미협상 중재자를 자처했다가 촉진자로 물러선 한국 역시 북한에게 뾰족한 수가 될 수 없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이에 비해 러시아는 북한을 포용해 얻을 수 있는 이점들이 있습니다. 옛 사회주의 종주국인 소련의 후신인 러시아는 전통적으로 북한 핵문제 진행 과정에 개입하는 것으로 자신의 동북아시야 영향력 확대를 꾀해 왔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대선 승리를 도왔다는 의심을 받고 있는 러시아는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경제제재에서 풀려나기는커녕 정치 경제 안보적으로 더 큰 압박을 당하고 있다는 불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러시아는 북핵 문제에 대해 중국이상으로 북한과 인식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최근 서울에서 열린 한-러 대화에 참석한 한 언론인은 참석한 러시아 측 인사들의 주장이 최근 북한의 그것과 너무나 유사하다는 점에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전언을 토대로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국제 사회의 많은 전문가들은 이미 북한을 인도 파키스탄, 이스라엘과 같은 반열로 놓는다. … 국제사회 제재에도 북한은 핵과 미사일을 개발했다. 제재는 핵개발을 지연시켰을지 몰라도 막지는 못했다. 평양 시내에 금수 사치품인 렉서스와 도요타자동차 등이 굴러다니지 않는가(국책연구소 소장).”

“핵 폐기 검증 사찰단은 북한뿐만이 아니라 주한 미군에도 보내야 한다. 미국의 핵 폭격기가 북한 주변에 비행하지 않는다는 것도 한반도 비핵화에 포함되어야 한다(전 주한대사).”

“유엔 대북 제재 결의안에 따라 올해 말까지 러시아에 있는 북한 근로자는 모두 돌아가야 한다. 많을 때는 7만 명까지 됐으나 지금은 1만5000명가량인데 이것이 ‘0’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유엔 결의안에서 근로자를 제외하지 못한 것은 ‘외교적 실책’이었다(전 주북한대사).”

유엔 대북제재를 승인했고 이행을 책임져야 할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러시아 인사들이 제재를 비난하는 것은 충격적입니다. 특히 국책연구소 소장은 “북한은 미국이 이란과의 핵협상 파기처럼 합의를 쉽게 뒤집는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북미 양국만의 합의가 아니라 여러 국가가 참여한 가운데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6자회담 프로세스 같은 다자협의체를 다시 가동하자는 것으로 북미 양자회담 국면에서 붉어진 ‘러시아 패싱’ 논란을 잠재우고 자신들의 존재감을 높여야 한다는 지극히 러시아 국익위주의 발언으로 풀이됩니다.

이런 정황들은 러시아의 개입이 북미 비핵화 협상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장애가 될 것이라는 관측에 힘을 실어주고 있습니다. 비핵화 협상의 주체는 미국과 북한이며, 러시아 역시 한국이 자처했던 중재자 역할을 하기 어렵다는 현실을 감안하면, 북-러 밀월 속에서 북핵문제는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는 꼴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러시아의 개입이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 레짐을 흔드는 상황까지 초래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 또한 일반적인 관측입니다. 러시아 역시 공식적으로는 북한 핵·미사일 개발에 반대하고 있으며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 제재 이행의 책임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우크라이나 침공 등의 이유로 러시아에 대해 경제제재를 가하고 있는 미국은 러시아의 경솔한 행동에 반격을 가할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러시아가 안보리 상임이사국 자격으로 대북 제재의 완화가 필요하다고 선언해 주거나 기존 제재의 예외조항으로 빼놓은 나진하산 경제협력 사업 추진 필요성 언급 등의 선언적인 조치들은 나올 수 있습니다.

장 위원은 보고서에서 “러시아의 등장을 꼭 부정적으로 볼일은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무엇보다 북한이 현재의 대화와 협상 트랙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는 역할을 해줄 수 있다는 기대입니다. 북-러 정상회담이 성사된다면, 북한의 그릇된 상황 판단과 이에 따른 군사적 도발이 치명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이 명확히 지적되어야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신석호 동아일보 디지털뉴스팀장(북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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