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구 논설위원의 對話]“나 사는 거 보고 애국할 사람 줄면 안 되는데…”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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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의 증손 이항증 씨

이항증 씨의 증조모인 김우락 여사와 조모인 이중숙 여사도 석주 이상룡 선생과 함께 만주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했지만 서훈을 받지 못했다. 이 씨는 9일 인터뷰에서 “첫 서훈이 있었던 1962년에는 여성들에 대한 인식이 낮아서 올릴 생각을 못 했던 것 같다”며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모친(허은 여사)도 지난해에야 애족장에 서훈됐다”고 말했다.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이항증 씨의 증조모인 김우락 여사와 조모인 이중숙 여사도 석주 이상룡 선생과 함께 만주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했지만 서훈을 받지 못했다. 이 씨는 9일 인터뷰에서 “첫 서훈이 있었던 1962년에는 여성들에 대한 인식이 낮아서 올릴 생각을 못 했던 것 같다”며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모친(허은 여사)도 지난해에야 애족장에 서훈됐다”고 말했다.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희생과 공헌의 정도에 상응하여 국가유공자와 유족의 영예로운 생활이 유지·보장되도록 실질적인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 제2조 ‘예우의 기본이념’) 한 노인이 있다. 증조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수반)을 지낸 석주(石洲) 이상룡 선생. 조부(이준형)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순국 자결했고, 역시 독립운동을 했던 아버지(이대용)는 6·25전쟁 중 46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했다. 불령선인의 자식으로 낙인찍힌 그의 형들은 중학교도 진학하지 못한 채 울분 속에 살다가 젊은 나이로 사망했고, 그렇게 기울어진 가세 때문에 노인과 그의 여동생은 한때 보육원에서 살아야 했다. 야간 고등학교를 나온 그는 80세인 지금 자기 집 없이 전세를 살고 있다.》
 
이진구 논설위원
이진구 논설위원
―올해가 3·1독립만세운동 100주년입니다. 석주 선생 등 독립운동가 39인이 만주에서 발표하신 무오독립선언이 3·1만세 운동의 기폭제가 됐다고 하던데요.

“증조부는 종택(宗宅·종갓집)인 임청각(보물 제182호) 등 재산을 팔아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한 뒤 온 가족을 이끌고 만주에 망명했고, 서로군정서와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강습소를 설립했습니다. 또 독립운동가 39인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독립선언인 무오독립선언(1919년 2월 1일)을 발표했고, 이 무오독립선언이 도쿄 2·8독립선언, 3·1독립만세운동으로 이어졌지요.”

―조부와 부친의 독립운동 활동상은 어떠셨는지요.


“조부와 부친은 증조부와 함께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증조부가 돌아가신 1932년에 고향인 안동으로 돌아왔습니다. 조부는 독립운동을 하며 얻은 병이 깊어지고, 일제의 회유와 압박이 심해지자 ‘일제 치하에서 하루를 살면 하루의 부끄러움만 더할 뿐’이라며 자결하셨지요. 부친도 평안북도 청성진경찰서를 습격하는 등 무장투쟁을 하셨고 이 때문에 징역 7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습니다. 1990년 조부는 애국장, 부친은 독립장에 추서됐고, 제 어머니(허은 여사)도 지난해 애족장에 추서됐지요.”

―자결까지 할 정도로 압박이 심했습니까.

“증조부의 반혼제(返魂祭·죽은 사람의 혼을 집으로 불러들일 때 지내는 제사)에서 손님은 물론이고, 제문까지 검열했답니다. 산속으로 숨었더니 거기까지 순사들이 들이닥치고, 아들인 제 부친을 잡아넣기도 했고요. 그런 상태에서 당시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싱가포르를 점령하니까 독립이 희박해졌다는 절망에 그러신 것 같아요. 결국 생신날인 1942년 9월 2일 자결하셨지요. 부친께는 ‘내가 자결하는 것은 참된 도리를 알게 하려는 뜻이니 나의 마음을 헤아려 과도하게 슬퍼하지 말라’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시고요.”

―국가보훈처에 석주 선생의 서훈 등급 조정을 요청하셨다고요.

“건국훈장에는 대한민국장, 대통령장, 독립장, 애국장, 애족장 등 5등급이 있는데 증조부가 받은 독립장은 3등급입니다. 1962년 서훈 당시 친일파들이 심사하다 보니 제대로 심사가 안 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별로 조정할 생각이 없는 것 같더군요.”

―명백한 이유가 있으면 당연히 조정되는 것 아닙니까.

“현행 상훈법은 서훈의 추천, 확정, 취소에 대한 규정만 있지 훈격을 조정할 수 있는 규정이 없어요. 저평가나 과대평가가 확인돼도 등급을 조정할 수가 없는 거죠. 옛날에는 자료 조사가 부실해서 엉성하게 평가한 경우가 많았어요. 가짜 국가유공자도 있을 정도니까. 하지만 민원을 우려해 안 하는 거죠.” (민원 우려라니요?) “건국훈장 수훈자가 1만5000명(건국포장, 대통령 표창 포함) 정도 됩니다. 등급 조정 신청을 받으면 상당수가 우리 할아버지 등급을 더 올려달라고 하지 않겠어요? 그러다 보면 내려가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우리 할아버지가 쟤네 할아버지보다 못한 게 뭐냐는 시비가 날 수도 있고…. 그래도 해야지요. 그런데 법 개정안을 심사도 하지 않고 있으니….”

―유관순 열사조차 여전히 3등급 독립장으로 남아있는 이유가 그 때문인가요?


“그렇지요. 훈격 조정 규정을 신설하자는 건데 2017년 9월에 발의됐지만 뭐 쟁점 법안이라며 심사도 제대로 되지 않고 있어요. 아까 말한 이유로….”

석주 이상룡 선생
석주 이상룡 선생
―한때 보육원에서 살았다고 들었습니다만….

“월사금을 못 내서 중학교에서 맨날 쫓겨났지요.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형들이 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 고등학교도 가기 어려웠고…. 1956년인가? 당시에는 보육원에 있으면 정부에서 야간 고등학교라도 보내줬어요. 여동생이 보육원에 간 것도 중학교에 가기 위해서였지요. 전 그나마 졸업 때까지 있지 못했어요. 만 18세가 넘으면 나와야 하니까. 낮에는 학교에서 소사 일도 하고, 페인트칠도 해서 돈을 벌고 밤에는 학교를 다녔지요.”

―조부와 부친께서 일제 치하에서 끝까지 호적 등록을 거부하셨다고요.

“증조부, 조부, 부모님이 다 독립운동을 하셨는데…. 증조부는 99칸 대저택인 안동 임청각에 살 정도로 대부호였죠. 노비만 수백 명이었으니…. 증조부가 상당수 재산을 팔아 독립운동 자금으로 썼지만 그래도 남은 재산이 좀 있었는데 조부와 부친이 독립운동을 하느라 잘 관리를 못 하니까 그 사이에 문중의 다른 집에서 야금야금 빼갔다고 하더군요. 나중에 어떤 사람이 부친이 자기에게 판 거라며 매매계약서를 내미는데 1974년에 판 걸로 돼 있더라고요. 아버지는 1952년에 돌아가셨는데…. 조부와 부친은 고성 이씨 종손인데 일제 치하에서 호적 등록을 끝까지 거부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문중에서는 재산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집안의 여러 구성원 명의로 등기를 했고, 수십 년이 지나면서 소유권이 불분명해졌지요. 형님들은 불령선인 자식이라고 학교도 못 다니고…. 그렇게 어려워진 거죠.”

―불령선인 자식이라 학교를 못 다녔다고요?

“증조부, 조부, 부친 모두 조선총독부의 불령선인 명부에 올랐지요. 여기 오른 사람 자식들은 초등학교는 몰라도 중학교는 입학이 안 됐어요. 큰형님, 둘째형님이 그래서 중학교를 못 갔고…. 큰형님은 광복 후 친일파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잡혀갔다가 풀려난 지 며칠 후에 돌아가시고, 둘째형님은 6·25 때 행방불명되고…, 셋째 넷째형님들도 돈이 없어 진학을 못 하다가 한 분은 열차 사고로, 한 분은 그런 스트레스로 술을 너무 드시다가 일찍 돌아가셨지요.”

―생활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제대하고 안동에 내려왔는데 옆집에 촌수는 멀지만 300여 년간 이웃하며 살던 문중 집안이 있었어요. 그 집 어르신이 탤런트 이서진 씨의 할아버지인데 그분이 조흥은행에 취직시켜 줘서 30년을 일했지요.” (당시에 은행원이면 괜찮은 직업 아닌가요?) “물려받은 재산은 없었고…. 아버지 없는 조카가 9명이나 되다 보니 큰 도움은 아니어도 아이들이 정착하는 데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었어요. 집에서 인터뷰를 못 한 것도 (집이) 좀 그래서….”

―안동 임청각 사당에 신주(神主·죽은 사람의 위패)가 없다고 들었습니다만….

“증조부가 종손인데 만주로 떠나기 직전에 마지막 제사를 지내면서 ‘나라가 망했는데 가문이 무슨 소용이냐’며 땅에 묻으셨다고 해요. 원래 돌아가신 날에 각각 제사를 지내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어서 지금은 매년 8월 15일 오전 11시에 합동으로 지내고 있지요.”

―선조께서 그 많은 재산을 팔아 독립운동에 썼는데 혹시 ‘안 그랬으면…’ 하는 생각은 안 해보셨습니까.


“내가 어렸을 때 ‘밥 한번 실컷 먹어봤으면 좋겠다’고 한 적이 있나 봐요. 난 기억이 없는데 어머니께서 그게 한이 됐는지 회고록에 적어두셨더라고요. 그 많은 전답을 팔아 독립운동을 했는데 정작 먹을 게 없어 굶고 있는 현실이 답답하셨나 봅니다. 어릴 적에는 이런저런 생각도 했지요. 학교도 못 다니고 했으니까…. 그러다가 증조부에 대해 알게 되면서 생각이 바뀌었어요. 아버지가 독립운동 간부로 추대됐는데 2대 독자이다 보니 증조부와 조부를 모셔야 한다고 고사했대요. 그러자 증조부가 제 부친을 부르더니 ‘나라 찾겠다는 사람이 집 걱정을 해서야 되겠느냐’며 혼내셨답니다.”

―인터뷰를 잘 안 하신다고 들었습니다만….

“나 사는 모습 보면 누가 애국하려고 할까 싶어서…. 잘사는 애국지사 후손들이 (언론에) 나와야 사람들이 ‘나라 위하니까 국가가 보호해주는구나’ 하고 애국하지 않겠어요. 올해는 3·1만세운동 100주년인데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어요. 무오독립선언, 2·8독립선언에서 3·1만세운동으로 이어진 그 정신을 우리 모두가 잊지 말아야 해요.”
 
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
#3·1운동#국가유공자#석주 이상룡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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