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포커스]관공서 주변 공영주차장 텅텅… 간이 화장실 앞엔 인파 북적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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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연방정부 셧다운 3주째


2일 미국 수도 워싱턴을 대표하는 링컨기념관 앞 간이 화장실의 줄이 유달리 길어 보였다. 미국 연방정부 업무 일시 정지(셧다운) 여파로 기념관 화장실을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거 몰렸다. 인파에 섞여 간이 화장실 이용 차례를 기다렸다. 순서가 다가올수록 악취가 코를 찔렀다. 화장실 안에는 오물이 가득했다. 한 10대 여학생은 기자에게 “미국의 수도 워싱턴 한복판에 저렇게 더러운 시설이 있다는 것이 창피하다”고 했다.

멕시코 국경장벽 건설 논란으로 2018년 12월 21일부터 시작된 셧다운이 2주를 넘겼다. 민주당은 하원 다수당이 된 3일 116대 미 의회 개원 첫날을 맞아 일부 예산안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멕시코 국경장벽 부분을 제외하고 작성한 예산이어서 공화당이 장악한 상원 통과가 쉽지 않아 보인다. 상원을 통과해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가능성이 커 셧다운 사태가 언제 해소될지 불투명하다.

이날 권력 서열 3위인 하원의장에 오른 민주당 낸시 펠로시 의원은 “국경장벽 건설 예산은 없으며 대통령 탄핵도 주저하지 않겠다”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 역시 “취임 후 이렇게 많은 지지를 받은 적이 없다. 장벽 건설 철회는 없다”고 맞불을 놨다. 양측 대립이 이어지면서 전례 없는 당파 싸움과 국론 분열로 인한 미 민주주의의 후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 마비된 수도 워싱턴


국무부, 상무부, 교육부 등 주요 행정부처에선 생기조차 사라지고 있다.

셧다운 후 국무부를 방문한 적이 있다는 한 정부부처 관계자는 2일 기자에게 “대부분의 사무실이 텅텅 비었다”며 “북한 이란 등 핵심 외교안보 임무를 맡은 일부 필수 인력만 남아 있더라”고 했다. 그는 “까다롭기로 악명 높던 국무부 보안검사 절차도 아예 사라져 살짝 걱정도 들었다”고 덧붙였다.

이날 기자가 찾은 국무부 청사 주변도 한산함만이 가득했다. 자동차가 빼곡했던 인근 공용 주차장도 텅 비었다. 밤늦게까지 영업하던 일부 식당도 오후 1, 2시에 문을 닫았다.

워싱턴의 대표 관광지인 ‘내셔널 몰’ 광장 역시 관광객으로 넘쳐나던 평상시와 다른 풍경이었다.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스미스소니언박물관 인근에선 관광객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날은 셧다운 여파로 박물관마저 문을 닫은 첫날. 휴관 소식을 들은 관광객들이 모두 다른 곳으로 발길을 돌린 듯했다.

○ 일상이 된 셧다운

“셧다운에 놀라는 사람이 없어요. 다들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만 으쓱하고 말죠.”

1일 8선 출신의 스티브 이즈리얼 전 연방 하원의원(민주·뉴욕 3선거구)이 NBC방송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셧다운이 더 이상 이례적이거나 예측 밖 사건이 아니며 유권자들도 둔감해지고 있다는 뜻이다.

셧다운 주기는 확연히 짧아지고 있다. 빌 클린턴 행정부 때인 1995년 12월 시작된 21일간의 셧다운 후 다음 사례는 18년이 흐른 뒤인 2013년 9월 말 버락 오바마 행정부 때 발생했다. 약 4년 4개월 뒤인 2018년 1월 20일 트럼프 행정부가 출범하자마자 또 셧다운이 발생했다. 그리고 불과 1년도 지나지 않은 2018년 12월 21일 그 위기가 재연됐다(2018년 2월 9일 하루짜리 셧다운 제외).

‘18년→4년→1년’이란 주기 변화만 봐도 셧다운의 일상화가 피부로 느껴진다. 빌 슈나이더 조지메이슨대 정치학과 교수는 NBC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셧다운이라는 극단적 수단이 워싱턴의 일상이 됐다는 점이 충격적”이라고 말했다.

○ 불어나는 경제적 피해

경제적 피해도 심각하다. 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셧다운이 진행되는 매주 미 국내총생산(GDP)이 12억 달러(약 1조3560억 원)씩 감소할 것으로 내다봤다. 무디스의 마크 잰디 수석연구원도 셧다운이 올해 1월 말까지 계속되면 미 GDP가 87억 달러(약 9조8310억 원) 줄고 1분기 미 성장률 또한 0.2%포인트 하락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특히 워싱턴은 도시경제 전체가 심각한 타격을 입고 있다. 미 노동통계국(BLS) 등에 따르면 워싱턴 광역권 고용 인원의 52%에 달하는 170만 명이 직간접적으로 연방정부에 생계를 의존하고 있다. 워싱턴 주민 둘 중 한 명이 연방정부 관련 업무에 종사하는 셈. 이들의 급여 지급이 중단되면 소비심리 위축 및 내수 악화가 불가피하다.

누구보다도 두려움을 안고 있는 이들은 이른바 사회적 약자들이다. 뉴욕타임스(NYT)는 연방정부 자금 의존도가 높은 약 190만 명의 인디언이 피해를 입을 것으로 예측했다. 특히 네바다, 미시간, 위스콘신, 아이다호주 등의 인디언 부족 거주 지구에서 식량, 생필품, 의약품 부족 사례가 빈번하다. 캔자스주 포타와토미의 인디언 조지프 러프닉은 NYT와의 인터뷰에서 “셧다운은 언제나 가장 궁핍한 사람들에게 먼저 영향을 미친다”고 비판했다.

○ 왜 자주 발생하나


트럼프는 한 해에만 세 차례의 셧다운을 겪은 대통령이 됐다. 1977년 지미 카터 당시 대통령 이후로는 41년 만에 처음. 재임 중 카터 전 대통령은 5회,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은 8회의 셧다운을 경험했다. 하지만 카터 행정부 때는 예산안 합의만 불발됐을 뿐 연방정부 업무가 실제 정지되지는 않았다. 일종의 ‘명목상 셧다운’이었다. 레이건 때의 셧다운도 길어야 며칠에 불과했다.

트럼프 정권 출범 후 발생한 셧다운은 기간도 길 뿐 아니라 사회 전체에 미치는 악영향도 커졌다. 격화된 사회 분열과 정쟁(政爭)으로 ‘정치적 이득을 위해서라면 정부 업무를 멈출 수도 있다’는 생각이 자리 잡으면서 눈에 보이는 피해 이상으로 치러야 할 사회적 비용이 더 크다는 우려마저 나온다.

일각에서는 잦은 셧다운의 이유를 미국 사회 체계에서 찾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국회에서 예산안이 통과되지 않으면 정부가 전년 예산에 준해 ‘준(準)예산’을 편성할 수 있다. 반면 미국은 의회가 예산안 심의, 의결, 편성 권한을 모조리 쥐고 있어 의회 다수당과 대통령의 소속 정당이 다르면 충돌이 불가피하다.

셧다운 발생 후 트럼프 대통령은 ‘국경장벽 건설비 50억 달러’, 민주당은 ‘기존 국토안보부 예산 13억 달러’만 앵무새처럼 되풀이하고 있어 접점 찾기의 묘책이 요구된다는 목소리가 높다.

○ 바나나 공화국의 민낯

2013년 9월 셧다운을 눈앞에 둔 오바마 전 대통령은 “이곳은 바나나 공화국이 아니라 미 합중국”이라며 정치권 대타협을 촉구했으나 실패했다. 바나나 공화국은 농산물 수출에만 의존하는 저개발국을 뜻한다. ‘마지막 잎새’로 유명한 미 작가 오 헨리가 단편 ‘양배추와 왕’에서 자연자원에만 의존하고 독재와 부패로 망가진 중남미 가상 국가를 지칭하며 유명해진 표현이다.

연이은 셧다운 사태는 세계 최강대국 미국 또한 바나나 공화국의 오명에 휩싸일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 의회 설득 대신 행정명령만 남발하는 대통령, 대통령의 정책을 무력화하기 위해 셧다운이란 위협 카드를 꺼내는 다수당의 등장. 그 모습 자체가 초당파적 국정 운영이 사라지고 당리당략만 우선하는 미국 정치의 민낯을 드러냈다는 뜻이다.

몰리 레이놀즈 브루킹스연구소 연구원은 미국의소리(VOA) 방송에 “양당이 상대방 탓만 하는 상황에서 초당적 협력이 성사될 가능성은 낮다”고 평가했다.

▼美 최초의 셧다운은 언제?…셧다운의 역사▼

미 최초의 셧다운은 제럴드 포드 대통령 재임 기간인 1976년 9월 30일 발생했다.

워터게이트 사태로 갑작스레 권좌에 오른 포드 대통령은 ‘선거로 뽑히지 않은 대통령’이라는 이유로 정통성 논란에 시달렸다. 오일쇼크에 따른 인플레, 만성 재정적자 등도 그를 괴롭혔다. 이 와중에 야당 민주당이 복지·노동·교육을 총괄하는 신설 부처를 만들겠다고 하자 포드는 거부권을 행사했다.

민주당은 거세게 반발했고 같은 해 10월 10일까지 총 10일간 연방정부가 마비됐다. 포드 대통령은 한 달 후 치러진 대선에서 민주당의 지미 카터에게 백악관을 내줬다.

카터 대통령도 집권 첫 해인 1977년에만 세 차례의 셧다운을 겪었다. 이는 소위 ‘낙태 셧다운’으로도 불린다. 당시 집권 민주당은 낙태 비용을 저소득층 의료보험(메디케이드) 예산에서 보조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공화당은 반대했고 셧다운으로 이어졌다. 카터는 1978년과 1979년에도 각각 한 차례씩 셧다운을 경험했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횟수로는 미 대통령 중 최다인 무려 8차례의 셧다운을 겪었다. 집권 공화당과 하원을 장악한 민주당은 국방, 교육, 해외 원조 등 각종 예산안을 두고 사사건건 충돌했다. 이에 1981년(1회), 1982년(2회), 1983년(1회), 1984년(2회), 1986년(1회), 1987년(1회) 등 거의 매년 셧다운이 발생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은 재임 중 두 차례의 셧다운을 겼었다. 두 번째 셧다운은 1995년 12월 15일부터 이듬해 1월 6일까지 21일간 이어졌다. 1회 셧다운 기간 중 가장 길다.


::셧다운(업무 일시 정지)::

셧다운은 미국 연방정부의 공공업무가 일시 정지되는 현상이다. 예산안이 제출 기한 안에 의회를 통과하는 데 실패하거나 대통령이 통과된 예산안에 거부권을 행사할 때 발생한다. 셧다운이 발생해도 국민 생명과 재산 보호에 직결되는 필수 서비스, 즉 국방, 범죄 수사, 소방, 교통 업무는 차질 없이 가동된다. 반면 여권 및 비자 발급, 정부 발주 공사, 국립공원 도서관 박물관 면허시험장 운영 등은 중단된다.

워싱턴=이정은 특파원 lightee@donga.com / 한기재 기자 / 전채은기자 chan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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