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화의 미술시간]〈36〉피란 중의 기다림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2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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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 샤갈. ‘마을의 성모’ 1938∼1942년.
마르크 샤갈. ‘마을의 성모’ 1938∼1942년.
일반적인 달력과 달리 교회력은 성탄 4주 전에 새해가 시작된다. 이를 대림절 또는 강림절이라고 한다. 성탄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대림 기간 동안 교회와 신자들은 초 네 개를 준비하고 매주 하나씩 초를 밝힌다. 러시아 유대인 태생의 화가 마르크 샤갈은 약 80년 전 대림 시기에 이 그림을 그렸다.

나치 정권이 유대인 대학살을 자행하던 몇 년 동안 샤갈은 성서를 주제로 한 그림을 여러 점 그렸다. 그중 1938년 파리에서 그리기 시작한 이 그림은 그가 나치를 피해 프로방스의 작은 시골 마을로 급히 이주할 때도 짐 속에 있었다. 1940년 대림 시기, 샤갈은 이 그림의 작업에 다시 착수했다. 화면 오른쪽엔 아기를 안은 성모 주위로 노래하고 악기를 연주하는 천사들과 동물이 둥둥 떠다니고, 왼쪽 아래엔 그의 고향 유대인 마을 풍경과 함께 대림 일주일을 의미하는 초 하나가 밝혀져 있다. 그런데 성모는 신부가 입는 드레스와 면사포를 쓰고 있고, 하늘에서 성모에게 손을 뻗는 건 성령이 아니라 샤갈 자신이다. 아내인 벨라를 성모의 모습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성서 내용에서 모티브를 얻었지만 실은 화가 자신이 꿈꾸는 평화롭고 사랑스러운 세상을 그린 그림이다.

화가의 바람과 달리, 1941년 나치 군이 파리까지 점령하자 유대인이었던 그는 또다시 미국으로 피신해야 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거쳐 뉴욕까지 목숨을 건 여정이었다. 샤갈의 작품과 화구가 든 짐은 딸의 도움으로 뉴욕으로 옮겨졌는데 다행히 이 그림도 포함돼 있었다. 해서 이 그림은 마침내 1942년 뉴욕에서 완성됐다. 장장 4년 동안 유럽과 미국의 여러 도시를 거치며 피란살이 중에 완성한 그림인 것이다.

샤갈은 어두운 시대를 살아내면서도 우울한 현실을 그대로 화폭에 담는 대신 서정적이고 신비롭게 표현해 명성을 얻었다. 그가 ‘시인 같은 화가’로 불리는 이유다. 샤갈이 그림 속에 초를 밝히며 간절히 기도하고 기다렸던 건 성탄이 아니라 전쟁의 종식과 사랑하며 사는 세상이 아니었을까.
 
이은화 미술평론가
#마르크 샤갈#마을의 성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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