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일의 갯마을 탐구]〈16〉섬에도 수만 년 역사가 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1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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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무성한 수풀을 헤쳐 나가며 며칠째 산등성이를 올랐다. 갯벌이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산 중턱 오솔길을 따라 걷다 보면 조릿대가 무성한 곳에 닿는다. 신석기인이 먹고 버린 굴 껍데기 더미를 살피기를 여러 날. 드디어 빗살무늬토기 몇 조각이 눈에 들어왔다. 틈틈이 패총을 찾은 결실이다. 이 땅에 살던 사람들이 사용하던 물건을 찾고 싶었다.

섬 주민들의 삶을 기록하기 위해 연평도에 들어왔다가 수천 년 전의 삶과 마주했다. 걸어서 두 시간이면 해안 둘레길을 다 돌 수 있는 작은 섬에 신석기 패총 10여 곳이 산재해 있다. 밭으로 이용되거나 잡목으로 뒤덮여 있다. 그 흔적 앞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의 향기를 맡았다. 굴을 쪼아 먹던 신석기인들. 근육을 움직이지 않고는 이어갈 수 없는 생명. 사람 사는 모습의 치열함과 아름다움이 패총 속에 켜켜이 쌓여 있었다.

어느 날, 경로당 건설 현장과 마주했다. 순간 연평도에 산재해 있는 패총의 위치가 오버랩됐다. 건설 현장 아래에 패총이 있을 거라는 강렬한 직감이었다. 터파기 공사가 시작될 때까지 며칠 동안 공사장 주변을 배회했다. 땅속을 자세히 살필 기회를 엿본 것이다. 굴착기가 잠깐 쉴 때 파헤쳐진 지표면을 유심히 관찰했다. 빗살무늬토기편 여러 점을 발견했다. 공사 관계자는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때 먹고 버린 굴 껍데기 더미이고 토기편은 그 시절 깨진 장독이나 도자기일 거라고 둘러댔다. 신석기 유적으로 추측되었지만 고고학을 전공하지 않았으니 확신할 수 없었다.

다음 날이면 패총은 완전히 파헤쳐질 것이었다. 패총을 이대로 사라지게 할 수는 없었다. 그날 저녁,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사진을 올리고 고고학 전공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곧바로 매장문화재 발굴 기관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근무하는 전공자들의 댓글과 전화가 줄을 이었다. 그들을 통해 후기 신석기 패총임을 확인했다. 날이 밝자마자 수습한 토기편을 들고 면사무소로 향했다. 면장과 담당 공무원에게 새롭게 발견한 패총을 설명한 후 공사를 일시 중단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 덕분에 연평도에 산재한 10여 개의 패총 중에서 유일하게 발굴조사가 이뤄졌다.

문화재청의 발굴시행 명령이 있기까지 여러 날이 걸렸다. 그동안 건설사 관계자, 노인회장, 주민들은 공사 중단에 따른 건설 기간 연장과 추가 경비 지출을 우려해 매일같이 나를 찾아와서 한숨을 부려놓았다. 문화재 보호와 개인 재산권 보호 사이의 딜레마 속에서 그들의 불만을 들어주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패총에도 사람의 삶이 녹아 있었고, 패총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 또한 사람살이의 모습이다. 과거의 삶을 기록하는 일과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존, 어느 한쪽도 외면할 수 없는 일이다.

패총은 신석기부터 연평도에 존재했던 사람살이가 줄곧 이어지고 있는 증거다. 지금도 연평도 주민들은 갯벌에서 굴을 캐며 살아간다. 조기의 섬으로 상징되다가 지금은 꽃게의 섬이 된 연평도. 그전에는 굴의 섬이었다. 신석기인이 먹고 버린 굴 껍데기가 지금은 밭이 되고, 대나무 숲과 언덕이 되고, 그 위에 펜션과 경로당이 들어섰다. 신석기인 삶의 흔적이 쌓이고 쌓여 지금의 연평도가 됐다.
 
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섬#연평도#패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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