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란의 사물 이야기]시집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8월 16일 03시 00분


코멘트
혹시 연필심으로 쓰이는 흑연과 다이아몬드의 성분 원소가 같다는 말을 들어 보신 적 있는지요? 흑연도 다이아몬드같이 탄소 원자로 이루어져 있긴 한데 흑연의 원자들은 단단히 결합된 다이아몬드와는 달리 서로 층을 이루면서 결합돼 있다고 합니다. 바로 그 성질 때문에 겹겹의 섬유로 만들어진 미세한 종이 표면에 흑연 가루가 달라붙어서 글을 쓸 수 있는 것이고요. ‘문구의 과학’이란 책을 읽다가 알게 된 사실입니다. 흑연의 결합구조가 다이아몬드와 달라서 참 다행이지 않습니까.

때로는 연필과 종이만 있어도 위로가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좁은 방에 오래 있을 때나 기분이 가라앉을 때, 혹은 가슴을 뒤흔드는 문장을 만난 책을 덮고 났을 때. 며칠 전에 ‘무서운 슬픔’이라는 시를 읽다가 허리를 곧추세웠습니다. “뱀은 모르겠지, 앉아서 쉬는 기분/누워서 자는 기분/풀썩, 바닥에 주저앉는 때와 팔다리가 사라진 듯 쓰러져 바닥을 뒹구는 때”. 시는 이렇게 끝납니다. “뱀이 지나가듯, 순식간에 그 집 불이 꺼지는 이유”. 갑자기 누가 불을 끈 듯 사위가 고요해졌습니다. 시에서 느낀 무서운 슬픔, 무서운 아름다움이 스쳐 지나간 것일지도요.

무엇에 가슴이 뛰는지, 평생 나를 사로잡는 것은 무엇인지, 하는 질문을 주거나 받을 때가 있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문학이, 시가 그렇기도 하겠지요. 한때는 저도 시를 쓰고 싶었습니다. 새 시집을 손에 들 때면 여전히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오래전 대학에서 시를 배울 때 스승은 시는 언어의 정수(精髓)라고 말하였습니다. 언어의 정수. 그것은 얼음처럼 깨끗할 것이며 군더더기 없고 나와 타인을 껴안는, 정신을 일깨우는 힘을 가졌을 거라고 여겼습니다. 흠모하는 마음으로 지금도 매일 시집을 읽습니다.

쓰다, 읊다, 짓다, 낭송하다. 시(詩)에 쓰이는 동사들은 주어를 필요로 합니다. 당신은 시를 쓴다, 그는 시를 낭송한다처럼. 어디에나 연필과 종이가 있습니다. 짧게라도 일기를 쓰면 그건 생활의 시라고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요. 서사문학의 시작을 혼잣말에서 찾아볼 수 있듯. 쓴 말보다 쓰지 않은 말이 중요할 때가 있지요. 뭔가 읽거나 쓰다 보면 그래서 더 사색하게 되는 것 같고요. 생은 반드시 아플 때가 있습니다. 마음을 쉬게 하면서 또 채울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시를 읽고 쓰는 일이 아니더라도. 온전히 좋은, 가슴을 뛰게 하는 게 하나쯤 있으면 더 살아갈 만할 것 같습니다.

종이로 만들 수 있는 가장 얇은 책이지만, 파블로 네루다 시집 제목처럼 ‘충만한 힘’을 가진 시집 이야기로 연재를 마칩니다. 정현종 시인의 ‘인사’라는 시가 있습니다. “모든 인사는 시이다. 그것이 반갑고 정답고 맑은 것이라면.” 독자들께 정답고 맑은 인사를 보냅니다. <끝>
  
조경란 소설가
#시집#언어의 정수#파블로 네루다#충만한 힘#정현종 시인#모든 인사는 시이다 그것이 반갑고 정답고 맑은 것이라면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