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란의 사물 이야기]맥주잔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8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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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위와 열대야 때문에 산책도 숙면도, 어떤 일을 집중해서 해내는 것도 어려워졌다. 이렇게 폭염에 지쳐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다가 순식간에 가을이 오면 당황할 텐데. 어쨌든 지금은 이 타는 듯한 하루를 잘 보내는 일이 큰일처럼 느껴진다. 그날 해야 할 일을 간신히 하고 저녁을 맞는다. 냉장고 문을 열면 캔맥주들이 나란히 놓여 있다. ‘액체의 빵.’ 보는 것만으로도 침이 고인다.

맥주가 액체 빵이라고 불리게 된 일화가 있다. 맥주의 주원료 중 하나인 홉의 첨가량이 많을수록 맥주의 영양가는 높아지고 귀한 대접을 받았다. 교회의 고문서에서 “액체 섭취는 금식에 반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발견한 후 수도사들은 금식 기간에도 이 홉의 첨가량을 높인 맥주를 마시면서 영양을 보충했다고 한다. ‘맥주, 문화를 품다’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인데, 내가 읽은 맥주에 대한 책들은 이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신은 와인을 만들고 인간은 맥주를 만들었다.”

맥주의 주된 원료는 맥아, 홉, 물이지만 또 하나 맥주의 필수 요소를 말하라고 한다면 단연 거품이다. 맥주 거품은 탄산가스가 새 나가는 것을 막아 신선한 맛과 향을 유지시킨다. 맥주를 유리잔에 따라 마셔야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최근 맥주 소비량이 급등하고 수제 맥주가 인기를 끌면서 전용 잔을 모으는 사람도 늘었다고 한다. ‘맥주의 모든 것’을 쓴 맥주 비평가의 말에 따르면 네 가지 종류의 잔만 있으면 두루 쓸 수 있단다. 필스너 잔(길고 호리호리한), 바이젠 잔(굴곡 있는), 파인트(보통 맥주잔), 고블릿(튤립 모양의 잔).

동생 집 근처에 대형마트가 생겼는데 맥주에 잔을 끼워 파는 행사를 했던 모양이다. 벨기에 맥주잔을 하나 준다고 하기에 망설이다가 사양했다. 위의 네 가지 기본 잔들은 이미 갖고 있는 데다 식당이나 맥주 박물관에서 기념품 대신 사거나 구해온 잔들도 있으니까. 희망봉 근처 식당에서 얻어온 그곳 대표 맥주 ‘캐슬’ 잔, 삿포로 맥주 박물관에서 사온 잔, 대학로 펍에서 받은 카스 생맥주잔. 하루 치 작업을 마친 후 그날의 맥주와 유리잔을 고른다. 전용 잔은 필수품이 아니라 있으면 더 좋은 것.

맥주 관련 책들을 읽다 보면 맥주의 품질과 맛을 표현하는 단어들이 소개돼 있다. 드라이한, 흙냄새가 나는, 톡 쏘는 듯한, 청량한, 깔끔한, 풍부한 등등. 그럴듯하지만 맥주에 관해서라면 이 말을 능가하는 게 있을까. “아, 시원하다!” 입추는 지났고 곧 처서가 돌아온다. 우리 동네는 한 열흘 전부터 밤이면 귀뚜라미가 울기 시작했다. 이 폭염이 믿기지 않는, 다른 계절이 올 것이다. 날씨 탓 그만하고 어서 내일을 준비해야 할 텐데. 걱정은 잠시 잊고 꿀꺽꿀꺽, 차갑고 순간적인 행복의 첫 모금을 마신다.
 
조경란 소설가
#맥주#맥주잔#신은 와인을 만들고 인간은 맥주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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