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광의 시의 눈]챔피언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3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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챔피언 ―김혜수(1959∼)

한 사내가 버스에 오른다
왕년에 챔피언이었다는 그의 손에
권투 글러브 대신 들려 있는
한 다발의 비누가
세월을 빠르게 요약한다
이 비누로 말하자면

믿거나 말거나
세탁해버리기엔 너무 화려한 과거를 팔아
링 밖에서 그는 재기하려 한다
맨 뒷좌석의 여자가 단돈 천원으로
한 번도 챔피언이었던 적 없는
챔피언의 몰락한 과거를 산다
한 번도 그녀 자신이었던 적 없는
자신의 재기를 다짐하듯

그를 다시 본 건 달포 후
한강을 막 건너고 있는 전철 안에서이다
비누 대신 그의 손에 들려 있는
한 세트의 칼
왕년에 전과자였다는 그가
다시 칼을 뽑는다
이 칼로 말하자면


이 비누로 말하자면… 다음에 나올 말을 우리는 안다. 제품의 성능을 과장해서 설명하고는, 명품을 헐값에 팔아야 하는 딱한 사정을 주르륵 늘어놓을 것이다. 승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하소연이 이어지는가 하면, 좀 센 말이 튀어나오기도 한다. 이를테면, “학생, 단돈 천 원도 없나? 아, 맘 잡고 살아보려 하는데, 사회가 안 받아주네” 같은.

레퍼토리는 다양하지만, 여기에 늘 빠지지 않는 게 바로 “왕년”이다. 사내는 어제의 챔피언이 되어 비누를, 출소한 전과자로서 칼을 판다. 믿거나 말거나일 그 왕년은 하지만, 문득 사람 마음을 움직인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꿈꾸지만 어두운 객석을 못 벗어나는 게 인생이다. 챔피언이든 전과자든 찻간을 전전하는 그의 모습은, 우리의 잊었던 꿈을 생각나게 하고 답답한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 몰락했으나 포기하지 않는 삶이 또 누군가에게는 재기의 의지를 다지는 기회가 될 것이다. 그래서 그만 비누를 사고 칼을 사기도 하는 거겠지.

점포도 좌판도 없는 장사엔 왕년이 자본이다. 그것은 앉아서 고객을 기다리지 않고 손수 걸어 찾아다닌다. 이 칼로 말하자면… 다음에 나올 말도 우리는 잘 안다. 제 왕년을 팝니다. 저는 어떻게든 이걸로, 다시 일어나야 하니까요. 이게 전 재산이니까요…. 비누와 칼이 세월과 인생을 압축하듯 시인은, 인간 삶의 간단치 않을 주름과 그늘을 맵시 있게 요약한다. 군더더기가 없다.

이영광 시인
#챔피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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