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양섭 전문기자의 바둑人]<28>“명품은 자연이 80%-사람이 20% 만들죠”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5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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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바둑판 제작 외길 인생… ‘6형제 바둑’ 대표 신완식 씨

신완식 씨(오른쪽)가 바둑판 제작과 인연을 맺은 지 50년. 그를 비롯한 6형제는 매일 작업복 차림으로 근무했다. 2일 창립 50주년을 맞아 모처럼 양복을 입었다. 완식 씨부터 왼쪽으로 형제 서열대로 명식 병식 춘식 추식 우식 씨. 타이젬 제공
신완식 씨(오른쪽)가 바둑판 제작과 인연을 맺은 지 50년. 그를 비롯한 6형제는 매일 작업복 차림으로 근무했다. 2일 창립 50주년을 맞아 모처럼 양복을 입었다. 완식 씨부터 왼쪽으로 형제 서열대로 명식 병식 춘식 추식 우식 씨. 타이젬 제공
전남 곡성에서 달걀 열여섯 꾸러미를 팔아 상경해 바둑판 수리를 배웠다. 그로부터 50년간 바둑판만을 만들어온 바둑판 제조업체 ‘6형제 바둑’ 대표 신완식 씨(64). 남동생 5명과 함께 숱한 고비를 넘기고 지금은 국내 바둑판 판매의 70%를 차지하는 탄탄한 업체로 키워냈다.

신 씨는 2일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팔야리에 있는 바둑판 공장에서 프로 기사와 거래처 등 200여 명을 초청해 창사 50주년 행사를 가졌다. 프로 기사로는 양상국 9단, 정수현 명지대 교수, 김성래 5단, 최명훈 9단이 참석했다. 그에 앞서 1일 신 씨를 만났다.

그에게 곧장 ‘요즘 같은 인터넷 시대에 바둑판이 잘 팔리느냐’고 물었다. 그는 1998년 외환위기 시절부터 이야기를 풀어갔다.

“외환위기 때 판매가 되레 늘었다. 돈이 없다보니 기원에 가는 사람이 많았다. 요즘 불황이라지만 판매가 크게 줄지는 않았다. 보급판 판매는 줄었지만 원목 바둑판이 꾸준히 팔려 매출액은 비슷하다. 지난해 매출액이 17억4000만 원으로 괜찮은 편이다. 새 사옥도 마련했고, 바둑판 원목 재고도 많아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본다. 최근 유치원까지 확대된 바둑 보급도 매출에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한다.”
바둑판의 재료인 고급 원목의 단면. 네모 부분이 바둑판으로 만들어지는 곳. 윤양섭기자 lailai@donga.com
바둑판의 재료인 고급 원목의 단면. 네모 부분이 바둑판으로 만들어지는 곳. 윤양섭기자 lailai@donga.com

신 씨가 바둑판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64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에서 놀다 ‘이래선 안되겠다 싶어’ 어머니를 졸라 달걀 열여섯 꾸러미를 받아 서울로 올라왔다. 어머니가 찾아가보라던 외가쪽 먼 당숙의 소개로 조남철 국수의 명동 송원기원에서 허드렛일을 하게 됐다. 청소하고 잔심부름을 하는 일이었다. 저녁에 바둑통에 180개씩 바둑알을 넣는 것도 그의 일. 어느 날 바둑판 줄이 지워진 것을 보고 손톱으로 바둑판을 누른 뒤 성냥개비에 먹을 묻혀 줄을 그렸는데 그 모습을 본 조 국수가 바둑판 목공소에 취직시켜줬다. 거기서 모두가 퇴근한 뒤 자투리 나무에 대패질도 하고, 널빤지에 가로 세로 19줄긋기도 하고 화점도 찍어보면서 기술을 하나둘 익혀갔다. 얼마 뒤 바로 밑 동생 명식 씨도 상경했다. 고향에선 “그걸로 입에 풀칠이나 하겠느냐”는 비아냥거림도 있었지만 오기가 생겼다. 20대에 청년 기술자가 돼 전국을 다니며 바둑판을 수리해주기도 했다. 당시 영등포 서울기원이 잘나갔는데 하루에 동생과 함께 72개를 수리해준 적도 있다고 했다. 벌이가 짭짤했다.

1975년 금호동에 ‘중앙바둑’을 차려 독립했다. 병식(셋째) 춘식 씨(넷째)도 합류했다. 그는 수원 인천까지 자전거로 바둑판을 배달했다. 접이식 바둑판 100개를 자전거 뒤에 싣고 동인천까지 6시간 반 만에 배달한 적도 있다. 하지만 힘든 줄 몰랐다. 1978년에 그는 접이식 바둑판 뒷면에 장기판을 그려 넣어 빅 히트를 치기도 했다. 이후 오토바이로 배달하다가 1982년 1.4t 트럭을 장만하면서 전국을 누볐다. 공장도 청계천을 거쳐 태릉으로 넓혀갔다.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까지는 조훈현과 조치훈 기사 덕분에 바둑 붐이 일던 때였다. 그러다 사기도 당하고 1987년에는 태릉 공장에 불이 나 원목을 송두리째 날리기도 했다. 재기할 수 있었던 것은 거래처와 주변의 도움 덕분이었다. 당시 엔지니어였던 다섯째 추식 씨가 마지막으로 합류하면서 회사 이름을 ‘형제 바둑’으로 바꿨다. 공장도 현재의 남양주로 옮겼다. 회사 이름을 ‘6형제 바둑’으로 한 건 2004년 회사를 법인화할 때.

최고급 거북모양의 바둑판의 뚜껑을 들고 있는 신완식 대표. 뚜껑 안에는 태극문양을 그려넣었다. 윤양섭기자 lailai@donga.com
최고급 거북모양의 바둑판의 뚜껑을 들고 있는 신완식 대표. 뚜껑 안에는 태극문양을 그려넣었다. 윤양섭기자 lailai@donga.com
신 씨는 남양주에 둥지를 튼 후 원목을 확보하기 위해 중국 미국 대만 인도네시아까지 누볐다. 그때 건진 원목이 그의 재산목록 1호다. 1990년대 초 대만에서 일본인이 사려다 포기한 비자나무 원목 800개를, 1997년에는 중국 쿤밍(昆明)에서 미얀마로부터 흘러나온 비자나무 바둑판 원목 1200개도 사들였다. 중국 선양(瀋陽)에는 바둑알 공장도 차렸다. 이곳에선 하이난(海南)산 대왕조개로 흰 바둑알을 만들고 있다. 지난해 7월에는 방한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에게 신석으로 만든 바둑알을 선물하기도 했다.

그는 좋은 바둑판 원목으로 비자나무를 꼽았다. 보통 바둑판은 돌을 놓다보면 얽은 자국이 생기는데 비자나무판은 며칠이 지나면 복원된다는 것. 향나무과라 향기도 좋고, 집안에 두면 모기가 도망간다는 설도 있다. 은행나무와 피나무, 계수나무도 좋은 재목이고, 요즘에는 알래스카산 수프로스(신비자나무)도 많이 쓴다.

그가 말하는 최고의 바둑판.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지름 1.6m 이상의 1000년 된 원목이 그 첫째다. 다음엔 이 원목을 그늘에서 10년 이상 자연 건조해야 한다. 이어 3년에 걸쳐 바둑판을 만든다. 13번의 공정과 170번 정도의 손질을 거쳐야 하는 정교한 작업이다. 줄긋기는 화룡점정이다. 좋은 바둑판은 지금도 손으로 줄을 긋는다.”

흰 바둑돌의 재료가 되는 대형조개. 중국 하이난섬 인근에서 잡힌다. 윤양섭기자 lailai@donga.com
흰 바둑돌의 재료가 되는 대형조개. 중국 하이난섬 인근에서 잡힌다. 윤양섭기자 lailai@donga.com
국내에서는 1억 원짜리 바둑판이 팔린 적이 있다고 했다. 일본에서는 비자나무 바둑판이 2억 엔(20억여 원·1980년대 일본 양옥 40채 값)을 호가한다는 소리도 들었다고 소개했다.

바둑판을 만들며 보낸 50년. 이제 그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됐다. “전에는 우리가 명장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자연이 80%를 만들고 우리가 나머지 20%에 손을 대는 정도라 생각한다.” 가장 늦게 합류한 추식 씨의 경력만 27년. 6형제의 바둑판 제조 경력을 합치면 200년이 훌쩍 넘는데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는 바둑판 제작 판매 사업 외에 2012년 6형제바둑 문화센터를 왕십리에 낸 데 이어 수원 정자점, 서울 종로점도 냈다. 바둑문화를 조금이라도 확산시켜보자는 뜻이다.

6형제 바둑에는 자식세대까지 합류했다. 완식 씨의 아들 셋과 막내 우식 씨의 아들이 가업을 잇고 있다. 각자 영어 중국어 일어를 잘하거나 컴퓨터에 능해 해외 시장개척이나 재고 정리 등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정수현 명지대 교수는 “바둑판 제조에 혼과 열정을 바치는 장인정신도 그렇지만 한집안 형제들이 모두 바둑판 제작에 종사하는 것도 특별하다”며 “6형제 바둑은 바둑계의 자랑거리”라고 했다.

남양주=윤양섭 전문기자 lailai@donga.com


#6형제 바둑#신완식#바둑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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