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비에서]좋은 책 발굴 대신 ‘영상물 노예’된 출판계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2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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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레미제라블’ 개봉 때 같은 대박이 재현되길 바라죠. 이 영화는 27일 국내 개봉 예정인데, 다음 달 초에 열리는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큰 상을 받는다면 아무래도 가능성이 높아지겠죠?”

언뜻 들으면 영화 수입사 관계자의 발언 같지만, 최근 기자가 한 출판사의 편집자에게 들은 얘기다. 이 출판사는 19세기 미국의 실존 인물인 흑인 솔로몬 노섭(1808∼?)이 자신의 노예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자서전 ‘노예 12년’의 한국어판을 펴냈다. 이 편집자는 이 책을 원작으로 한 영화의 개봉 성적이 좋아 책 판매도 덩달아 늘어났으면 하는 기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기대를 가진 사람은 그뿐만이 아니다. 최근 몇 주 사이 같은 책을 펴낸 국내 출판사가 세 곳이나 더 있다. 저작권 보호기간(저자 사후 50년)이 한참 지난 이 책의 한글판은 영화 개봉 전 한두 권 더 나올지도 모른다.

‘노예 12년’에서 보듯 국내에서 스크린셀러(영화 흥행으로 주목받게 된 원작) 시장이 과열됐다는 지적은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2년 전 영화 ‘레미제라블’ 개봉 때는 원작소설이 10종 가까이 쏟아져 나왔고, 이 중 한 대형 출판사는 2개월 만에 10만 권 넘는 판매량을 기록했다. 지난해 5월 영화 ‘위대한 개츠비’ 개봉 즈음해선 한 대형 출판사가 국내 인기 소설가의 번역본으로 영화 수입사와 공동 마케팅까지 벌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요즘 출판사의 해외 저작권 담당자의 중요 업무 중 하나는 “어떤 책이 영화화되는지, 그 영화가 한국에서 개봉될 것인지를 잽싸게 확인하는 것”이라는 웃지 못할 얘기까지 들린다.

드라마도 예외가 아니다. 최근 출판시장에 쏟아지는 정도전 관련 책들 태반은 지난달부터 KBS에서 방송을 시작한 사극 ‘정도전’의 후광을 노린 것이다.

출판사의 얄팍한 상혼이나 독자들의 부박한 취향을 탓하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영상물의 ‘노예’가 된 출판계의 현실과, 이런 책들이 너무도 쉽게 베스트셀러 상위권을 점령하는 현상이 어려운 여건에도 좋은 책 발굴에 힘쓰는 출판인들의 기운을 얼마나 빼놓는지를 잊지 말았으면 할 뿐이다.

우정렬 기자 passi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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