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을 바꾼 순간]“대중스포츠가 된 스키, 장애인이 하면 사치입니까”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0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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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스키협회 이끄는 치과의사 김우성 회장

장애인을 위한 좌식스키 앞에서 포즈를 취한 김우성 박사. 그는 전국의 뜻있는 치과의사들과 함께 저소득 중증 장애인을 후원하는 
스마일재단 창설에 앞장섰다. 장애인스키협회 회장이기도 한 그는 스포츠가 장애인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장애인을 위한 좌식스키 앞에서 포즈를 취한 김우성 박사. 그는 전국의 뜻있는 치과의사들과 함께 저소득 중증 장애인을 후원하는 스마일재단 창설에 앞장섰다. 장애인스키협회 회장이기도 한 그는 스포츠가 장애인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귀를 의심했어요. 대한장애인스키협회 임원이라는 사람 입에서 ‘장애인이 스키를 타는 것은 사치’라는 말이 나왔으니까요. 많은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할 겁니다. 사는 것도 힘든 장애인이 무슨 스키까지 타느냐고.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이미 대중 스포츠가 된 스키가 왜 장애인에게는 사치가 되나요. 많은 사람들이 알아야 합니다. 장애인들에게 스포츠라는 게 어떤 희망을 줄 수 있는지, 올림픽(패럴림픽)에서 메달을 딴다는 게 장애인들의 삶을 얼마나 바꿔 놓을 수 있는지.”

김우성 박사는 치과의사다. 서울대 치대를 졸업하고 서울대와 연세대 등에서 외래교수를 하다 1976년 서울 퇴계로에서 ‘하인즈치과’라는 간판을 달고 개업의를 시작했다. 1985년부터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프레스치과’를 운영하고 있다. 먹고사는 데 전혀 걱정이 없어 보이는 베테랑 치과의사가 왜 이렇게 장애인스키에 대해 관심을 갖는 걸까.
산을 통해 알게 된 봉사의 기쁨

“다른 서클(동아리) 활동은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오로지 산악부였죠.”

태어나서부터 평생을 서울에서만 살았다. 고교 시절 ‘등산깨나 한다’는 이웃들이 주로 가던 곳은 인왕산이었다. 비록 부상으로 그만뒀지만 중학교 때 기계체조 선수를 하며 만든 다부진 몸은 암벽등반을 하기에 제격이었다. 인왕산을 다니며 등산의 매력을 조금씩 알아 갔지만 입시를 앞둔 터라 서울을 벗어나기는 쉽지 않았다. 명절 때 갈 곳이 없는 것도 못내 아쉬웠다. 대학생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1962년 바라던 대학생이 됐다. 가보지 못했던 전국 방방곡곡을 마음껏 돌아다니기에는 산악부만 한 곳이 없다고 믿었다. 입학하자마자 치과대학 산악부 문을 두드렸다. 산을 다니며 스키를 접했다. 요즘처럼 스키장이 따로 없던 시절 산악부원들의 스키부 활동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어느 해 여름. 부원들과 함께 태백산을 등정한 뒤 내려오는 길에 한 초등학교에서 처음으로 치과 봉사 활동을 경험했다.

“치과대학 산악부의 전통이었어요. 커다란 배낭에 치료 세트를 넣어 다니다 하산할 때 마을 주민들을 진료하는 거죠. 내가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생각에 보람을 많이 느꼈는데 웬일인지 해를 거듭할수록 아쉬운 마음이 생겼어요.” 개업을 한 뒤에도 개인적으로 의료 봉사 활동을 이어가던 그는 2002년 일일교사 자격으로 서울 상암동에 있는 특수학교를 방문한 뒤 충격을 받았다.

“장애인이 그렇게 많은 곳은 처음 가 봤어요. 함께 식사를 하는데 치아가 부실해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아이들도 꽤 됐어요. 그 아이들의 부모 중에는 제 자식 또래 분들도 꽤 있었는데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생각하니 제가 눈물이 날 것 같더라고요. 그때 마음을 먹었죠. 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자고.”

이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장애인 학교나 장애인 단체를 찾아다니며 봉사활동을 했다. 자신과 뜻을 같이할 수 있는 사람들도 찾아 다녔다. 그의 노력은 2003년 스마일재단이 창립되면서 열매를 맺었다. 스마일재단은 치과 질환이 있는 중증 장애인들을 직접 진료하고 치과치료비도 지원한다. 이동이 어려운 장애인을 위해 전국 네트워크를 갖췄다.

“환자 50명을 치료한다고 하면 500명쯤 신청을 해요. ‘살아 있는 동안 고기 한번 제대로 씹고 싶다’는 분이 너무 많은데 일부만 선정해야 할 때 참 안쓰럽습니다. 재단도 열심히 노력을 하고 있지만 후원을 해 주실 개인이나 기업이 더 많이 나타났으면 좋겠어요.”

스마일재단 창설을 이끈 그는 상임이사를 거쳐 2009년부터 2년 동안 이사장을 지냈다. 지금은 명예 이사장이다.
스키와 함께한 인생… 장애인스키 대부로

동호회 활동으로 시작했지만 스키는 그가 ‘스키인’으로 불릴 정도로 인생의 중요한 부분이 됐다. 실력도 동호인 수준을 훌쩍 넘었다. 1967년 겨울전국체육대회 스키 노르딕 40km 계주에서 우승을 할 정도였다.

“당시 스키부는 규율이 무척 엄했어요. 훈련을 하다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면 선배들이 ‘빠따’를 때렸죠. 겨울방학 때는 30∼40일씩 합숙 생활을 했는데 매일 새벽 6시에 일어나서 훈련을 시작했어요. 특히 후배 때는 밥 짓고, 찌개 끓이고, 차 만들고, 청소까지 해야 하는 고된 일과가 계속됐지만 그게 싫거나 힘들지 않았어요. 온통 눈으로 덮인 산을 지칠 때까지 질주한 뒤 끓여 먹었던 라면 맛은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레지던트 과정을 시작하면서 시간적 여유가 생기자 그는 대한스키협회 일을 거들기 시작했다. 국제이사로 있을 때는 국내에 처음으로 스키 패트롤(안전·구조 요원)을 도입했다. 국내 최초로 스키 패트롤 자격을 얻은 주인공이 바로 그다. 한국 최초의 국제 겨울 종합대회인 1997년 무주 겨울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는 팀원 33명을 이끌고 패트롤팀 단장으로 현장을 지켰다.

장애인스키와 본격적인 인연을 맺은 것은 2001년부터다. 당시 한국장애인복지진흥회에서 장애인스키협회 설립에 대한 논의를 꺼냈고 열악한 장애인스키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그가 맞장구를 쳤다. 그가 나서자 많은 서울대 스키부 출신 동문들도 도움을 줬다. 그는 안정적 재정 지원을 위해 제약회사인 한국MSD의 이승우 사장을 설득해 초대 회장을 맡게 한 뒤 자신은 수석 부회장으로 사실상 모든 업무를 챙겼다. 2006년 개장한 강원 정선군 하이원스키장이 세계 최고 수준의 장애인 친화적 시설로 설계된 것에도 그와 협회 임원들의 열정과 노력이 숨어 있었다.

“호텔과 콘도 객실 문턱을 없앴고 곤돌라의 문도 지면과 높이 차이가 없게 만들었어요. 장애인이 휠체어를 타고 이동하기 편하도록 하기 위해서죠. 장애인이 편하면 비장애인은 말할 것도 없는 거죠.”

장애인을 배려한 인프라 덕분에 하이원스키장은 2009년 장애인 알파인스키 세계선수권대회를 유치할 수 있었다. 하이원리조트 홈페이지는 ‘하이원의 키워드는 장애인 스키’라고 소개하고 있다. 2007년 하이원스키장에 국내 최초로 설립된 장애인 스키학교 역시 그의 작품이다. 이곳에서는 특수체육을 전공한 전문 강사들이 장애 유형에 따라 맞춤 강습을 한다. 목표했던 일들을 하나둘 이뤄 내는 사이 그는 어느덧 ‘장애인스키의 대부’로 불리게 됐다.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겨울장애인올림픽 때 대표팀 단장을 맡았는데 그때 한상민 선수가 좌식스키에서 은메달을 땄어요. 그걸 보니 정말 의욕이 막 솟구치는 거예요. 당시 알파인스키에서 메달을 따지 못한 일본 선수단 관계자들이 깜짝 놀라고 부러워했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기분이 좋습니다.”

그는 지난해 제6대 장애인스키협회 회장에 취임했다. 기업체 사장이 아닌 사람이 회장을 맡은 것은 그가 처음이다.
‘라테 두 잔 선배’의 꿈

김 회장은 후배들 사이에서 ‘라테 두 잔 선배’로 통한다. 동문 행사나 각종 치과의사 모임에서 ‘라테 두 잔’이라는 소리를 입에 달고 다니기 때문이다. 다른 대학 동문회까지 찾아다니며 ‘친목’ 골프대회를 ‘자선’ 골프대회로 바꾸라는 잔소리도 마다하지 않는다.

“요즘 웬만한 커피 전문점에 가면 라테 한 잔에 5000원 정도 합니다. 두 잔이면 1만 원이지요. 한 달에 라테 두 잔 덜 먹는다고 죽지 않잖아요. 전국에 있는 치과의사 2만 명이 한 달에 1만 원만 스마일재단에 기부하면 2억 원이라는 거액이 되는 거죠. 그 돈이면 훨씬 많은 장애인이 치과 치료를 받아 마음껏 먹고 웃을 수 있습니다.”

김 회장은 치과의사의 위상이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고 했다. 의사 수가 크게 늘어난 것도 이유이지만 무엇보다 임플란트가 널리 보급되면서 ‘일부 치과의사는 돈만 아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팽배해졌다고 나름대로 진단했다.

“떨어진 치과의사들의 위상을 높이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봉사활동이죠. 물론 개인적으로 노력해 평생을 먹고살 수 있는 (의사)자격증을 얻었지만 국가와 국민이 있어 의사 노릇을 할 수 있는 거니까요. 아직도 스마일재단이 어떤 일을 하는지 모르는 치과의사가 많아요. 현재 800여 명의 치과의사분들이 재단을 후원하고 있고 전국 300여 개 치과가 네트워크에 참여하고 있는데 이 정도로는 쇄도하는 장애인들의 도움 요청을 모두 해결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형편입니다. 돈이 없다면 재능으로 기부하면 됩니다.”

지난해 스마일재단 이사장직을 내려놓고 명예 이사장으로 한발 물러난 김 회장이 요즘 가장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은 장애인스키협회 일이다. 2018년 평창에서 장애인겨울올림픽이 열리기 때문에 더 막중한 책임감을 느낀다.

“한 대기업이 2018년까지 컬링 종목에 100억 원을 후원하기로 하는 등 비장애인 겨울 종목들은 ‘평창 특수’를 누리고 있어요. 하지만 장애인 겨울 종목의 환경은 여전히 열악합니다. 올해만 해도 장애인스키에 배정됐던 훈련비가 2억2000만 원에서 1억1000만 원으로 절반이 축소되어 선수들의 훈련에 차질이 많았어요.”

얼핏 보면 단순해 보여도 경기용 좌식스키는 한 대에 1000만 원을 훌쩍 넘는다. 개인적으로 마련하기에는 부담이 너무 크다. 스키에 뛰어난 소질이 있는 장애인이 많지만 장비가 없어 꿈을 펼치지 못하고 있다. 주위의 도움이 절실한 상황이다.

“대학 때 동아리 활동을 하지 않았다면 스마일재단과 장애인스키협회는 저와 무관했을 겁니다. 그 덕에 삶이 완전히 바뀌었죠. 유망주를 발굴해 2018년 평창 겨울장애인올림픽 스키에서 한국 최초의 금메달을 따는 게 또 하나의 봉사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대학 때 열심히 스키를 탄 것처럼 이번에도 취미 활동 열심히 해 봐야죠. 제 취미가 봉사거든요. 하하.”

이승건 기자 why@donga.com
#김우성#장애인 스키협회#장애인 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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