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우영의 영화와 심리학]인크레더블 헐크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9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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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참다가 방전되는 ‘정신적 맷집’… 명절후반 분노폭발 조심

브루스 배너(에드워드 노턴)는 실험 중 감마선에 노출된다. 그 부작용 때문에 배너는 심장 박동 수가 200을 넘을 정도로 화가 나면 헐크라는 녹색 괴물로 변하게 된다. 그의 능력을 악용하려는 정부 군대의 추격을 피해 브라질로 도피한 배너. 그는 브라질 무술 고수를 스승으로 모시고 분노를 통제하는 법을 익힌다.

스승은 분노를 조절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몸을 통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마음에서 일어난 분노를 몸을 통해 조절하라는 뜻이다.

스승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줄이려면 배로 호흡하라고 알려준다. 그러곤 배너의 뺨을 사정없이 때린다. 따귀를 한 대 맞을 때마다 배너의 손목에 있는 맥박 측정기 수치가 점점 올라간다. 하지만 그는 스승에게 배운 복식호흡을 통해 맥박 수를 낮추는 데 성공한다.

참고, 참고, 또 참다 보면?

루이 르테리에 감독의 2008년 작품 ‘인크레더블 헐크(The Incredible Hulk)’는 분노와 자기조절의 관계에 대한 심리학적 통찰을 바탕에 깔고 있다. 조금 의외일 수도 있지만,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을 잘 조절하거나 통제하지 못하는 주된 이유는 배너의 스승 말마따나 바로 그 사람의 몸에 있을 때가 많다. 몸에서 일어난 불균형이 마음의 균형을 깨뜨리기 때문이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마음의 균형이 깨지면 몸에 이상이 오는 일도 흔하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독립적으로 기능하지 않고 서로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그래서 몸이 변하면 마음이 변하고, 마음에 변화가 오면 몸이 변한다.

마음은 그 형체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접근하거나 조작하는 것이 쉽지 않다. 반면 몸은 그 형체가 분명하고 조작하기도 쉽다. 따라서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마음보다 몸에 접근하는 것이 더 용이한 경우가 많다.

스트레스나 위협에 직면하면 우리 몸의 교감신경계는 부신으로 하여금 스트레스 호르몬인 에피네프린과 노르에피네프린을 분비하도록 한다. 이 호르몬들은 심장 박동 수, 혈당 수준, 땀 분비, 호흡 수는 증가시키고, 침 분비와 소화기관의 활동은 억제시킨다. 이런 모든 일이 숨 가쁘게 일어나면서 몸에서는 열이 나게 된다. 스트레스 받았다는 것을 ‘열 받았다’라고 표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스트레스는 실제로 우리를 열 받게 만드는 것이다.

깊은 숨을 천천히 쉬는 호흡법은 이러한 열을 냉각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기계의 공랭식 냉각기처럼 심호흡은 뜨거워진 몸과 마음의 화를 식혀주는 것이다. 하지만 호흡만으로 충분히 냉정해지기란 그리 간단치는 않다. 호흡법의 초절정 고수가 아니라면 말이다.

브루스 배너도 호흡법을 열심히 수련하지만, 결국 다시 헐크로 변하고 만다. 조용히 살려고 하는 그를 끝없이 괴롭히는 정부군이 있기 때문이다. 배너는 처음에는 참고, 참고, 또 참는다. 하지만 이성적이고 친절한 성품의 그가 아무리 심호흡을 열심히 해도 더이상 참을 수 없는 순간이 찾아오고야 만다. 참는 데 필요한 에너지가 바닥나고 만 것이다. 그 순간, 사력을 다해 통제해왔던 마음속 분노가 폭발하면서 그가 입고 있던 옷이 갈기갈기 찢어진다. 헐크로 변하고 만 것이다.

명절 때 감정이 폭발하는 이유

배너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자기조절에 필요한 에너지가 고갈되면, 평상시와는 다른 모습으로 변하는 ‘두 얼굴의 사나이’가 되기 쉽다. 성격이 좋다는 것은 여러 스트레스 상황에서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잘 조절해서 상황에 맞는 적절한 말과 행동을 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하려면 주위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거나 오해받을 만한 말과 행동을 하고 싶은 충동이 솟구쳐도 이를 억누르고 미소를 지을 수 있어야 한다. 즉, 성격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조절과 통제가 필수적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자기조절과 통제의 과정에는 많은 에너지가 소모된다. 피곤할 때 짜증이 쉽게 나는 이유는 마음을 조절하는 데 사용할 에너지가 바닥났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구성원은 자신의 에너지를 직장이나 학교에서 모두 소진한 채로 집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 에너지가 완전히 방전된 상태로 가정에 복귀하면, 직장이나 학교에서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넘길 수 있었을 정도의 약한 스트레스에도 짜증이나 화를 내게 될 가능성이 커진다.

최악의 경우, 안과 밖 모두에서 지속적으로 스트레스에 노출되면 ‘정신적 맷집’이 아주 약해진다. 그래서 사소한 스트레스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이 되고 만다.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브루스 배너가 아니라 헐크로 사는 것이다.

로이 버마이스터 미국 플로리다대 교수 등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가 자기조절과 통제를 위해 사용하는 ‘연료’는 혈당이라고 한다. 실제로 한 연구에서는 설탕이 들어간 레모네이드를 마신 사람들이 무설탕 레모네이드를 마신 사람들보다 자기통제를 더 효과적으로 수행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명절은 오랜만에 가족과 한자리에 모여 행복을 나누는 날이다. 하지만 서로 마음의 상처를 주고받는 날이 되는 경우도 많다. 명절 스트레스가 하나씩 쌓이면 처음에는 표정 관리를 잘하다가도 마지막 순간을 견디지 못하고 폭발하는 사람이 꽤 많다. 아니면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헐크로 돌변하기도 한다.

만약 가까운 사람 중에 누군가가 평소와 다르게 까칠하게 군다면, 그 사람을 비난하기 전에 먼저 그의 영양과 건강 상태를 확인해 보는 것이 좋다. 그는 일부러 못되게 구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잘 대하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가 바닥난 상태일 가능성이 높다.

이런 사람에게 인간성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은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선 몸의 균형을 회복시켜 주는 것이 좋다. 그 첫 단계는 균형 잡힌 식사를 하고 에너지를 재충전할 수 있는 시간, 즉 휴식할 시간을 제공하는 것이다. 밥이 보약이라는 말이 있다. 잠이 보약이라고도 한다. 건강한 식사와 휴식은 육체의 보약이기도 하지만 정신적 맷집을 키워주는 마음의 보약이기도 하다.

전우영 충남대 교수·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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