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파워 시프트]<5·끝> 유럽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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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때문에 갈라선 ‘유럽합중국’… 정권교체로 돌파구 찾을까

《 이탈리아에서 대학을 나오고 프랑스 명문 국립행정학교(ENA) 졸업 후 독일계 주요 은행의 파리 지점에서 주식거래팀장을 맡고 있는 안젤리노 세드로스 씨(40). 그는 지금 고향 로마의 자산을 전부 처분하고 부모와 함께 독일에 정착하는 문제를 고민하고 있다. “유럽통합은 내가 경제학 공부를 시작했을 때부터 불변의 명제였다. 하지만 이탈리아까지 강타한 금융위기를 보며 나는 유로 회의론자가 됐다. 내 재산 가치가 추락하는 걸 언제까지 방관하겠나.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은 접었다.” 유럽이 1999년 1월 1일 단일 화폐 유로를 출범할 때는 ‘유럽합중국’의 꿈도 함께 키웠다. 하지만 지난해 그리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 남유럽 국가의 재정위기로 시작된 경제위기는 원대한 이상을 찢어놓고 있다. 유로존(유로 사용 17개국) 회원국들은 남과 북, 또는 구제금융 요청국과 지원국으로 나뉘어 삿대질을 하고 책임 공방을 벌이고 있다. 재정위기로 긴축의 직격탄을 맞은 유럽 청년들은 기성세대를 향해 분노한다. ‘관용과 연대’의 전통적 가치가 퇴색하고 전통적 복지국가 모델은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
○ 분열하는 ‘하나의 유럽’

올해 유럽에서 벌어질 파워시프트(권력이동)의 진정한 의미는 몇몇 국가의 정권 교체 차원을 떠나 유럽 공동체의 운명을 좌우하고 구성원들의 삶의 방식을 근본부터 바꿀 수 있는 거대한 폭풍일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지난해 12월 9일 유럽연합(EU) 정상회의에서는 재정적자가 3%를 넘으면 제재를 받는다는 ‘신(新)재정협약’에 합의했다. 하지만 영국은 비토권을 행사하며 합의에 참여하지 않았다. 영국과 프랑스 정부 간에 갈등이 심화됐다. 프랑스는 “당장 집안에 불이 난 프랑스 독일에 비해 영국은 한 집 건너 불이 난 걸 지켜보고 있다”고 비판했다.

핀란드는 유로존을 신용등급 트리플A 국가(6개국)와 나머지 국가로 나누자고 주장한다. 트리플A 6개국만의 공동채권을 발행하자는 주장도 있다. 재정정책 통합에 찬성하는 국가와 반대하는 국가 간 편가르기도 심하다. 재정 문제국인 일부 국가를 유로존에서 떼어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그리스 정부는 3일 2차 구제금융안이 최종적으로 합의되지 않으면 유로존을 떠나야만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동안 그리스가 유로화를 포기할 경우 유로존 전체에 경제위기를 심화할 수 있다고 판단해 유로존 탈퇴에 대한 공개적인 언급을 피해왔던 것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다음 달 19일 실시되는 그리스 총선에서 어떤 민심이 표출될지 주목된다.

4월 22일 1차 투표가 이뤄지는 프랑스 대선은 올해 유럽의 정치 지형에 영향을 미칠 가장 중대한 선거이다. 프랑스로 보면 사회당 소속 프랑수아 미테랑 전 대통령 퇴임 이후 17년 동안 권력을 잡은 우파와 권력 탈환에 절치부심해온 좌파의 대일전이다.

사회당의 프랑수아 올랑드 후보가 카리스마가 부족하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다. 그간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과 역시 우파인 독일 기민당 소속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유럽 재정위기 극복에 기조를 맞춰왔다. 그러나 올랑드 후보는 대통령이 되면 신재정협약부터 재협상하겠다고 예고했다. 시장과 자본의 논리를 중시하는 경제위기 극복 전선에 균열이 가는 것이다. 메르켈 총리와 사르코지 대통령이 추진해온 양국 간 조세 및 재정 통합 정책도 속도 조절이 불가피하다.

프랑스에서 우파 정권이 물러나면 프랑스 독일 영국의 유럽 트로이카 보수 정권 연대도 끝난다. 유럽 대륙에 좌파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이 돼 내년 독일 총선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 ‘톨레랑스와 솔리다리테는 안녕’


프랑스 파리 18구의 샤토 루주 지하철역 인근은 흑인과 아랍인 등이 밀집한 파리의 대표적인 할렘가다. 해가 지면 거주민을 제외하고 거의 인적이 끊길 정도로 삭막한 곳이다. 3일 오후 6시인데도 바르베스 대로 뒷골목은 상점 대부분이 문을 닫고 군데군데 청년들만 모여 담배를 피우거나 큰소리로 떠들고 있었다. 담뱃가게 종업원 피에르 씨는 “오후부터 나와 죽치는 청년들이 올해 들어 더 많아졌다. 대부분 실업자들이다”고 말했다. 프랑스는 지난해 11월 실업률이 12년 만에 최고를 기록했다.

유로 위기는 이념과 가치의 분열을 동반하고 있다. 긴축과 복지 축소, 청년 실업과 빈부격차가 확대되면서 유럽의 전통적 다문화주의가 설 자리를 잃고 포퓰리즘과 극우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유로존의 트리플A등급 6개국만 봐도 벨기에는 극우 성향 플레미시당이 원내 1당을 차지하고 있다. 대표적 극우당인 네덜란드 자유당과 오스트리아 자유당은 물론이고 핀란드의 ‘진정한 핀란드인’당이 모두 원내 3당에 포진되어 있다. 프랑스에서도 극우성향인 마린 르펜 국민전선 대선 후보가 사르코지 대통령에게 조금 못 미치는 지지율로 3위를 달리고 있다. 18∼24세 청년층엔 르펜 지지율이 더 높다.

에미네 보즈쿠르트 네덜란드 유럽의회 의원은 가디언에 “우리는 유럽 역사의 교차점에 있다”며 “5년 내 극단적인 민족주의와 외국인 혐오증, 이슬람 공포증 등 증오와 분열의 힘이 압도하는 것을 목격할 것”이라고 말했다.

프랑스 렉스프레스의 크리스틴 케르들랑 부편집장은 “30년 전부터 부채로 유지되는 사회 모델을 택해 미래 세대가 지불할 약과 요양 치료의 혜택을 누려온 우리가 다음 세대에게 모든 짐을 떠넘기는 잘못된 선택을 계속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재정위기에 따른 긴축의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으로 풀이된다.

그는 “인플레나 부동산 거품을 만든 뒤 뒤처리는 후손에게 미뤄온 대가를 이제 계산해야 할 시간이 왔다”며 “유럽은 행운의 베이비붐 세대가 은퇴하면서 폐허가 된 대륙을 후손에게 물려줄 것”이라고 비판했다.
▼ IFRI 드 몽브리알 소장 “EU내 소그룹 통합 이뤄질수도” ▼

유럽의 대표적 싱크탱크인 프랑스 국제관계연구소(IFRI)의 티에리 드 몽브리알 소장(사진)은 파리의 IFRI 사무실에서 동아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격동기 유럽의 현주소와 미래에 대해 상세한 분석을 내놓았다.

―새해 유럽 경제위기는 더 확산될 것으로 보나.

“신재정협약은 매우 의미 있는 첫발이다. EU 차원의 협약이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영국의 반대로 어쩔 수 없었던 만큼 최선의 중재안이었다. 유로존(17개국)을 포함해 25개 정도 국가의 의회가 비준을 마치기까지 일부 국가는 어려움을 경험할 것이다. 그러나 유럽은 경제적 통치 체제의 재조직을 통해 위기를 해결할 수밖에 없다. 올해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질문은 글로벌 스태그네이션(경기침체)을 피할 수 있을 것인지다.”

―새해로 출범 10주년이 된 유로존이 붕괴할 가능성은 있나.

“생각해 볼 수는 있다. 국제사회의 의심은 쓰나미의 결과를 부를 수도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상상할 수 없는 재앙의 위험 때문에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갈 가능성이 더 높다. 어느 유럽 국가도 끔찍한 재앙의 책임을 감당할 수 없다. 이 경우 지구촌 어떤 나라도 피난처를 구할 수 없다. 유로를 구할 해법은 극도로 엄격하고 통제되는 재정 원칙을 세우고 국가 간 연대의 메커니즘을 강화하면 된다. 그러나 동시에 유로존 회원국에 존재하는 분야별 경쟁력 격차를 줄이기 위한 경제 정책을 강화해야 한다.”

―프랑스가 신용등급 트리플A를 잃는 상황을 가정하면….

“심리적으로 이미 대비된 상태이기 때문에 충격이 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독일이 강등당하면 확실히 놀라운 충격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건 불가능하다. 경제에서는 아무리 어렵더라도 철저히 예상된 상황이 닥치면 큰 충격이란 없다.”

―EU가 위기 극복을 위해 중국에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

“정치적 제스처일 뿐 의미는 없다. 유로존 위기 극복에 대한 중국의 기여는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거나 거의 없다. 중국과의 관계를 감안한 수사에 불과하다.”

―위기를 맞은 유럽이 정치적, 경제적으로 분열하고 있는 것 같다.

“EU는 개방적이기 때문에 일정한 자격을 갖춘 나라의 가입을 막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27개국은 이미 충분히 많은 수다. 이 안에서 경제적 정치적 지향점이 일치하는 국가들이 좀 더 적극적인 방법으로 통합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경제적 분열이 있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유로존에서도 잘사는 나라와 덜 발전된 나라가 있는 건 당연한 일이다. 정치적으로 통합된 지역에서 부유국이 어려운 나라를 돕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탈리아도 남부는 북부의 보조금을 받고 있고, 프랑스도 지방은 파리와 수도권의 보조금을 받는다.”

―경제위기와 빈부격차가 심화되면서 유럽에서 극우 민족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데….

“유럽에서 포퓰리즘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국민전선이 2002년 대선에서 2위까지 한 프랑스는 더욱 그렇다.”

파리=이종훈 특파원 taylor5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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