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주의 철학으로 세상읽기]<23>‘문화대통령’을 마음에서 날려 보내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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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4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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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 서태지를 버려야 ‘인간‘ 서태지를 만난다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강원도에서 불거진 선거 비리와 관련된 부끄러운 소식도, 일본발 방사능 공포도 한 방에 날아가 버렸다. 1990년대 문화대통령으로까지 군림했던 서태지와 관련된 뉴스 때문이다. 원칙적으로 어떤 사람이 결혼을 하든 이혼을 하든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렇지만 서태지에게 열광했든 아니면 그의 활약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며 1990년대 청소년 시절을 보냈든 지금 20, 30대들에게 ‘타인의 사생활에 지나친 관심을 피력할 필요가 없다’는 충고가 먹혀들어 갈 수 있는가? 친한 친구나 아니면 앙숙이었던 친구가 결혼했거나 이혼한 사건은 우리에게는 중요한 일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실 지금 20, 30대들에게 서태지는 단순한 친구 이상의 의미를 지닌 존재였다. 청소년 시절 그들에게 서태지는 그들의 고뇌를 직설적으로 표현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들이 가야 할 비전도 제시해 주는 그야말로 모세와 같은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서태지를 통해 당시 청소년들은 힘든 성장통을 간신히 이겨냈다. 여기 당시 청소년들의 가슴을 울렸던 서태지의 외침을 잠시 떠올려보자.
매일 아침 일곱 시 삼십 분까지,

우릴 조그만 교실로 몰아넣고

전국 구백만의 아이들의 머릿속에,

모두 똑같은 것만 집어넣고 있어.

막힌 꽉 막힌 사방이 막힌,

널 그리곤 덥석 모두를 먹어 삼킨

이 시커먼 교실에서만,

내 젊음을 보내기는 너무 아까워.

(‘교실 이데아’)

우리 몸을 반을 가른 채 현실 없이 살아갈 건가.

치유할 수 없는 아픔에 절규하는 우릴 지켜줘.

시원스레 맘의 문을 열고 우리와 나갈 길을 찾아요.

더 행복할 미래가 있어, 우리에겐

언젠가 나의 작은 땅에 경계선이 사라지는 날,

많은 사람이 마음속에 희망들을 가득 담겠지.

난 지금 평화와 사랑을 바래요.

(‘발해를 꿈꾸며’)
지금 들어도 현실의 기득권에 연연하는 기성세대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노래들일 수밖에 없다. 앞의 가사가 청소년들의 삶을 옥죄는 교육현실에 대한 신랄한 풍자라면, 뒤의 가사는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들에게 통일의 중요성을 되새겨주는 평화 선언이었다. 그렇다. 서태지는 단순한 연예인이 아니었다. 1990년대 청소년들에게 서태지는 자신들을 가장 잘 이해하는 형이자 오빠였으며, 동시에 앞으로 삶을 예언하는 시인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들에게 서태지는 파란 하늘 위에 둥실 떠 있는 하얀 뭉게구름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자신들이 갇혀 있던 교실 너머 저 멀리 보이는 뭉게구름 말이다. 그들은 서태지가 있어서 경쟁으로 숨이 막히는 교실에서 그나마 숨을 쉴 수 있었으며, 서태지가 있어서 과거를 생각하고 미래를 꿈꿀 수 있었다. 1996년 서태지가 기자회견으로 은퇴를 선언했을 때 왜 그렇게 많은 눈물과 절규가 있었는지 이제는 이해할 수 있다. 당시 서태지는 울먹이면서 말했다. “무엇보다 앞선 은퇴 이유는 팬들의 가슴속에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고 싶다는 저희의 다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렇게 서태지는 우리 곁을 떠났다.

그가 팬들에게 했던 약속, 그러니까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아 있겠다는 약속을 믿으며 1990년대 청소년들은 자신들의 이상을 가슴 한쪽에 묻어야만 했다. 그렇지만 불행히도 서태지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뉴스거리를 찾는 연예부 기자의 먹잇감이 되어 만신창이가 된 가장 아름답지 않은 모습으로 20, 30대에게 찾아온 것이다. 유년 시절의 이상이었기에 20, 30대의 정서적 충격은 상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심지어 한때 팬이었던 그들은 서태지에게 강한 적개심까지 피력하기도 한다. 문득 이문열(63)의 소설 ‘사람의 아들’☆이 떠오른다. 민요섭 살인 사건을 추적하면서 신과 인간의 관계를 집요하게 되물었던 소설이다. 명문 고등학교 학생이었던 조동팔은 기독교와는 다른 의미의 신성을 발견해야 한다는 민요섭의 말을 맹신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그를 따른다. 그러던 중 민요섭이 자신의 신조를 버리고 다시 기독교로 회귀하자 조동팔은 자신의 정신적 지주를 살해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한때 열광적인 팬들이 서태지에게 돌을 던지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혹은 조동팔이 민요섭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르네 지라르☆☆(88)라면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욕망과 갈등의 숨겨진 메커니즘을 그만큼 분명하게 통찰했던 사상가도 없었기 때문이다.

만일 이미 뛰어난 존재를 부여받은 모델이 어떤 것을 욕망한다면, 더욱 총체적인 존재의 완전함을 부여할 수 있는 대상일 것이다. 모델은 말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욕망으로써 욕망주체에게 진짜 욕망할 만한 대상을 가리킨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욕망은 본질적으로 모방적이다. 그러므로 모델의 욕망을 흉내 내어 그 모델과 똑같은 대상을 선택한다”는 오래된 생각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폭력과 성스러움(La Violence et le Sacr´e)’
지라르는 우리의 욕망이 모두 타자, 특히 모델이 되는 사람의 욕망을 모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했던 사람이다. 그의 말이 옳다면, 인간의 욕망은 자발적인 것이기보다는 비자발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에게 있어 인간의 욕망은 일종의 삼각형을 형성하게 된다. 욕망주체, 모델, 그리고 욕망대상을 꼭짓점으로 하는 욕망의 삼각형 말이다. 당연히 무엇인가를 욕망할 때 우리는 어떤 모델의 욕망을 반복하고 있는지 되돌아보아야만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델의 위상이다. 모델은 글자 그대로 욕망주체가 선망하는 대상이다. 사실 욕망주체가 모델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는 이유도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모델이 욕망하는 것을 얻을 수만 있다면 자신도 모델처럼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 욕망주체가 모델의 수준으로 성장하거나 혹은 모델이 욕망주체와 비슷한 수준으로 추락할 때, 욕망주체의 욕망에는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제 욕망주체에게는 자신의 욕망을 지탱해 오던 준거점이 사라진 것이기 때문이다.

욕망이 사라진다면 인간은 살아갈 이유를 상실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모델은 모델의 위상을 차지하고 있어야만 한다. 모델이 사라진다면 우리에게는 욕망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야 분명해진다. 민요섭이 모델 역할을 포기할 때 조동팔이 왜 그를 살해했는지, 서태지가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으로 추락했을 때 20, 30대들이 왜 그에게 적개심을 보이는지 말이다. 더군다나 한때 미성숙했던 1990년대 청소년들은 이제 성인으로 성장했다. 이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서태지와 비슷한 수준의 안목을 갖추게 된 셈이다. 어쩌면 서태지가 은퇴를 결정했던 것도 혹은 은퇴 후 신비주의를 유지했던 것도 그가 더는 모델의 위상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팬들이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만큼 그는 모델로서의 숙명, 혹은 모델이 팬들에게 어떤 역할을 하는지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이다.

그만큼 서태지는 인간적으로 외로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990년대 청소년들의 모델이었던 그가 어떻게 편하게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겠는가? 지금 20, 30대가 된 그들이 아직도 청소년의 상태에 머물고 있는 것만 보아도 서태지의 외로움은 미루어 짐작이 가는 일이다. 그가 불행한 이혼으로 귀결된 사랑에 빠지게 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이제 서태지의 삶과 그가 희망했던 삶을 구별하도록 하자. 그것은 서태지를 위해서도,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이제 서태지를 사랑에 고뇌하는 평범한 사람으로 받아들이자. 그렇지만 그가 욕망했던 비범한 것들은 우리가 앞으로 두고두고 욕망해야 하는 것들로 마음속에 남겨두자. 그것이 바로 청소년 시절 우리를 무사하게 성인이 되도록 안내했던 서태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일 것이다. 지금 고립무원에 빠진 서태지의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환상 속에 그대가 있다/모든 것이 이제 다 무너지고 있어도/환상 속에 아직 그대가 있다/지금 자신의 모습은 진짜가 아니라고 말한다.”

<강신주 철학자·‘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철학, 삶을 만나다’ 저자>


::사람의 아들☆::


이문열이 1979년 ‘세계문학’에 발표한 중편소설이었는데, 그 후 1987년 개작하여 장편소설로 출간됐다. 표면적으로 인간, 신앙과 관련된 조동팔과 민요섭 사이의 갈등을 테마로 전개되지만, 이 소설은 예수 당시 사람의 아들을 지향했던 아하스 페르츠라는 인물과 신의 아들이라는 예수 사이의 갈등 부분을 매력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일종의 액자소설로 구성된 이 소설로 이문열은 제3회 오늘의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동시에 베스트셀러 작가로서의 입지를 다지게 된다.

::르네 지라르☆☆(Ren´e Girard)::

인간의 욕망이 ‘삼각형적 욕망(d´esir trianglaire)’이라고 밝혔던 현대 프랑스의 사상가. 주체는 자신의 욕망을 자신만의 것이라고 믿지만, 사실 주체의 욕망은 이상적인 모델이 욕망하는 것을 모방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델과 욕망주체가 비슷한 수준에 있게 되었을 때 모델과 욕망주체는 서로 경쟁하게 된다. 이 경우 폭력이 불가피하다는 것이 지라르의 핵심적인 생각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욕망에 내재된 경쟁과 폭력을 막기 위해 인류가 고안한 제도가 바로 희생의례다. 저서로 ‘폭력과 성스러움’ ‘희생양(Le bouc ´emissaire)’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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