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대한민국’ 세계 석학에게 듣는다]<5·끝>日근현대사의 대가 마쓰오 다카요시 교토대 명예교수

  • Array
  • 입력 2011년 1월 8일 03시 00분


코멘트

“日 식민지 권력 이용해 가져온 문화재, 돌려주는 게 당연”

《 “미래를 내다보기 위해선 역사를 제대로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특히 일본 사람에게 필요한 말입니다.” 일본 근현대사의 대가 마쓰오 다카요시(松尾尊兌) 교토대 명예교수는 시종 진지한 표정으로 ‘역사 바로 알기’를 강조했다. 그는 “앞으로 10년이 더 지나면 전쟁을 기억하는 세대가 사라질 것”이라고 우려하면서 “소수지만 일본의 양심적 정신을 계승해 한일관계를 열어가야 한다”고 호소했다. 지난해 12월 하순 인터뷰에 응한 원로 교수는 교토의 아담한 자택 응접실에 쏟아지는 따뜻한 햇살을 어깨에 받으며 역사와 미래를 이야기했다. 그의 말은 부드럽지만 단호했다. 그는 한일강제병합 100년을 맞은 지난해 양국 지식인들의 ‘병합조약 무효 공동성명’에 발기인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
○ 일본인, 과거 잊어선 안돼

―시대 변화가 빨라지면서 세상에는 온통 미래 이야기가 넘친다. 이 시대에 역사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과거를 알아야 미래를 제대로 알 수 있다. 이는 특히 일본 사람들에게 필요한 말이다. 일본인은 대부분 과거를 잘 모른다. 일본이 과거 한국과 중국 등 아시아 각국에 무슨 일을 했는지 모르고, 안다 하더라도 일부러 잊어버리려는 사람이 많다. 헌법 9조를 바꾸려는 움직임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평화헌법 조항으로 불리는 일본헌법 9조는 일본의 전력보유 금지와 국가교전권 불인정을 규정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 등 승전국의 주도로 제정됐다.

―다수 일본인이 잊고자 하는 역사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마쓰오 다카요시 교토대 명예교수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침략의 역사를 망각하고
있는 일본 정치권의 태도를 비판했다. 마쓰오 교수는 한일 강제병합 100년을 맞은 지난
해 양국 지식인들의 ‘병합조약 무효 공동성명’에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교토=윤종구 특파원 jkmas@donga.com
마쓰오 다카요시 교토대 명예교수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침략의 역사를 망각하고 있는 일본 정치권의 태도를 비판했다. 마쓰오 교수는 한일 강제병합 100년을 맞은 지난 해 양국 지식인들의 ‘병합조약 무효 공동성명’에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교토=윤종구 특파원 jkmas@donga.com
“내가 16세 때 전쟁이 끝났는데, 전쟁을 정확히 기억한다. 그러나 앞으로 10년이 더 지나면 전쟁을 확실히 기억하는 세대가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가장 우려되는 점이다. 나는 쇼와(昭和) 천황이 일본의 최고 전쟁지도자이자 책임자라는 점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 사람이 전쟁이 끝나도 천황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고 오랫동안 재임했다. 이런 점도 전쟁에 대한 무감각과 전쟁을 잊어버리고 싶어 하는 분위기와 관련이 있다. 정치권에서 무기수출 3원칙을 수정하려는 움직임이 있는 것도 역사를 망각한 것이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후 평화국가를 선언한 것을 잊어버린 것인가.”

―일본이 잊고 싶어 하는 역사에는 한국 관련 역사도 많을 것 같다.

“당신의 조국이 남북분단으로 여러 문제가 있지만, 왜 분단됐는가. 직접적으로는 미국과 옛 소련을 주축으로 한 동서냉전의 결과이지만, 간접적으로는 일본 책임도 있다. 일본이 더 일찍 전쟁을 끝냈더라면 남북분단이 없었을 것이다.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하면서 전쟁이 끝났는데, 그해 2월에 이미 일본엔 ‘전쟁에 졌다, 항복하자’는 의견이 천황 주변의 정치지도자들 사이에 있었다. 총리를 지낸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N)가 대표적으로 조기항복을 천황에게 건의했다. 천황은 이 말을 듣지 않았다. 2월에 일본이 항복하고 전쟁이 끝났더라면 오키나와(沖繩) 전쟁도, 원폭 투하도, 소련군의 남하도 없었을 것이고 그러면 한국이 분단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쇼와 천황은 남북분단에 책임이 크다. 일본의 책임이 큰 것이다. 쇼와 천황에게는 전쟁을 일으킨 책임과 항복을 늦춘 이중의 책임이 있다.”

―패전을 예상하고도 왜 일왕이 서둘러 항복하지 않았나.

“좀 더 유리한 전황을 만든 후 종전(終戰) 교섭에 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결국 원폭이 투하됐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대다수 일본인은 잘 모른다.”

―한국에서도 ‘일본은 역사교육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비판이 많다.

“알고 있다. 일본은 애국심이 중요하다는 교육방침에 따라 ‘평화교육을 하지 말자, 일본이 메이지(明治)유신으로 근대화를 이뤄 선진 강대국이 됐다’는 식으로 가르치고 아시아 침략 역사를 가르치지 않았다. 그래서 한국과의 사이에 역사교과서 문제가 불거진 것 아니냐.”

―그렇게 해서 진정한 애국심이 길러지나.

“바로 그것이다. 일본의 근대화는 주변국 침략을 통해 가능했다는 게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가르치지 않는다. 민주당 정권으로 바뀌었지만 아직도 이런 교육방침이 변하지 않고 있다. 일본이 역사를 모른다는 게 드러난 것은 영토문제에서다. 센카쿠(尖閣)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와 북방영토(쿠릴 열도 남단) 문제가 올해 잇따라 터졌다. 다케시마(竹島·독도의 일본식 이름)도 또 문제가 될 것이다. 일본은 이들 모두를 ‘고유영토’라고 주장한다. 사실이 아니다. 옛날엔 작은 섬은 특별히 어느 나라의 영토라는 개념보다는 가까이 사는 사람들이 공동으로 이용한다는 인식이 많았다.”
○ 영토분쟁… 과거 청산…

―일찍 근대화한 일본이 동북아시아가 혼란한 틈을 타 영토 욕심을 부린 측면도 있지 않나.

“확실히 그대로다. 영토 확장에 눈을 뜬 것은 근대국가체제가 확립된 이후의 일인데, 일본이 아시아에서 근대국가가 먼저 돼 그쪽으로 눈을 돌린 것이다. 최근 센카쿠와 북방영토 문제를 보면서 우려되는 것은 그게 ‘일본의 생명선’이라는 점을 부각시키며 국민을 선동하는 듯한 점이다. 무서운 느낌이 든다. 옛날에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킬 때에도 ‘만주는 일본의 생명선’이라는 주장을 폈다.”

일본은 청일전쟁으로 동북아시아가 아수라장이었던 1895년 1월 각료회의를 열어 센카쿠 열도를 오키나와 현에 편입했다. 러일전쟁 와중이던 1905년 1월엔 독도를 시마네(島根) 현에 귀속시켰다.

―센카쿠 문제에서 일본이 어떻게 대처했어야 했나.

“문제로 삼지 않고 덮어두는 게 현명한 방법이다. 중국인이 들어오면 그냥 추방하면 된다. 구속하니 중국이 화가 난 것이다. 모든 게 고유 영토라는 일본의 주장과 대응을 보면 아직도 제국주의적 관념이 남아있는 것 같다. 과거 역사를 잊었나 우려된다.”

―선생은 1919년의 3·1운동과 중국 5·4운동을 민주주의 관점에서 평가하고 있는데….

“당시 일본에서도 ‘조선의회를 만들고 조선의 자치를 인정하자. 장래에는 조선의 독립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다. 대표적 민주주의론자였던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 도쿄대 교수 등이다. 이런 민주주의 사상이 한반도에도 퍼졌고, 요시노는 3·1운동과 5·4운동 지도자들과 가까웠다. 요시노는 동아일보의 초창기 멤버인 장덕수, 장덕준과도 개인적 친분이 있었다. 요시노는 1916년 서울을 방문한 후 ‘반일 감정을 갖고 있는 독립운동가 몇 명을 만났다’고 잡지에 썼는데, 그중 한 명이 동아일보 창립자인 김성수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3·1운동은 일본의 조선정책에서 큰 분기점이었다.”

―이후 근본적 변화가 있었다고 보나.

“조선민족의 독립 열망에 대해 결국 일본은 그때까지의 정책을 좀 바꿨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바뀌진 않았고 요시노 등의 주장을 받아들이진 않았다. 당시 일본 위정자들 사이엔 조선도 시간이 흐르면 오키나와와 같이 동화될 것이란 인식이 강했다. 이게 문화정책이었다.”

―선생은 올해(2010년) ‘한일 병합조약은 무효’라는 한일 지식인 공동성명에 서명했는데, 일본인으로서 주저함이 없었나.

“두 나라 지식인이 공동으로 병합조약이 무효라고 주장한 것은 처음 있는 일로 획기적이다. 성명에 참여하지 않은 역사연구자들이 많지만 이들도 한일병합이 불의 부정했다는 점은 대부분 인정한다. 다만 무효라는 데에는 반대 의견이 많다. 나는 국제법적으로는 유효라고 생각하지만 정신적 의미에서는 무효라고 생각한다.”
○ 고령기 일본, 청년기 한국

―지금 한일 간에는 도서반환 문제가 현안이다.

“민주당에도 반대하는 의원들이 있다는 데 놀랐다. 정치인 중에 역사를 모르는 사람이 많다. 한일병합은 조선이 일본의 일부가 됐다는 의미 아닌가. 당시엔 아무런 제한 없이 문화재든 도서든 일본으로 갖고 왔을 것이다. 원래 한국에 있어야 할 문화재들이 일본 왕실을 포함한 정부기관 소유로 돼 있는 것은 모두 돌려줘야 한다. 민간이 갖고 온 것은 별개 문제이지만, 당시 일본 정부가 갖고 온 것은 당연히 돌려줘야 한다. 이는 당시 식민지 지배 권력을 이용해 갖고 온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간 적 있는데, 일본인이 기증한 물품이 있는 걸 보고는 꽤 기뻤다.”

―한일 양국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이 많다. 역사학자로서 한일관계의 바람직한 미래에 대해 한 말씀 해 달라.

“과거를 모르고 미래를 알 수는 없다. 일본에는 두 개의 일본이 있다. 일본인 중에도 두 명의 일본인이 있다. 침략적 성향과 평화적 민주적 성향이 그것이다. 과거 일본엔 후자가 소수파였다. 한국 지배에 대해서도 반대파가 있었지만 소수였다. 이런 소수의 양심적 정신을 계승해 한일 간 미래관계를 열어가야 한다. 역사를 잊어선 안 된다. 일본이 한국 지배에서 가혹하게 했던 일을 잊어선 안 된다. 마찬가지로 이에 반대한 일본인이 있었다는 사실도 잊지 말라. 또 양국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한 바탕 위에서 공통점을 찾는 게 중요하다. 같은 문화권이라는 공통점만 강조하면서 미래를 얘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지금 한일관계는 역대 가장 좋다는 평가가 많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한국 드라마와 영화 등을 즐기는 일본 사람들이 아주 많다. 나도 아내도 ‘대장금’을 재미있게 봤다. 문화적으로 가깝게 된 것은 TV의 영향이 크다. 이 때문에 인적 교류도 훨씬 많아졌다. 과거엔 한국이 일본보다 한 수 아래라고 다들 생각했으나 이젠 반대 측면도 많다. 경제도 교육도 한국이 위라는 걸 느끼고 한국의 실력을 실감하는 일본 사람이 많다. 이제까지 없던 현상이다.”

―역사학자로서 한국과 일본을 평가하자면….

“사람에 비유하면 일본은 고령기, 한국은 청년기다. 한국은 지금 활력이 넘친다. 조선 민족은 원래 대단한 역사적 문화적 기반이 있다.”

교토=윤종구 특파원 jkmas@donga.com

■ 마쓰오 다카요시는

△1929년 출생 △교토대 문학부 졸업, 문학박사 △하버드대 옌칭(燕京)연구소 초청연구원(1968) △교토대 문학부 교수, 명예교수(1993년∼ ) △교토다치바나(京都橘)대 교수, 명예교수(2003년∼) △저서: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1974년), 보통선거제도 성립사의 연구(1989년), 민본주의와 제국주의(1998년), 전후 일본으로의 출발(2002년) 등 다수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