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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역사를 따라 문화를 따라]<8>다산 유배의 길 실학사상을 집대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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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역사를 따라 문화를 따라]<8>다산 유배의 길 실학사상을 집대성하다

동아일보입력 2010-02-17 03:00수정 2010-03-19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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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그리움은 붉은 동백으로… 백성 사랑은 실학으로 피다
다산 정약용이 전남 강진 유배생활 18년 가운데 10년 동안 지냈던 다산초당. 그는 이곳에 책 1500여 권을 쌓아놓고 목민심서 등 500여 권을 저술했다. 강진=이광표 기자
《1801년 10월, 경북 포항에 유배돼 있던 정약용(1762∼1836)이 체포됐다. 서울 의금부로 압송되는 내내 정약용은 불안했다. 또 누가 나를 죽이려는가. 가장 큰 걱정은 폐족(廢族)이었다. 일곱 달 전 신유교옥에 연루돼 셋째 형 정약종과 매형 이승훈이 처형당했다. 둘째 형 정약전도 유배 중인데 또다시 무슨 음모인가. 의금부 옥사에는 이미 정약전이 압송돼 있었다. 이른바 황사영 백서사건. 정약용의 조카사위 황사영이 조선의 천주교 박해 실상을 비단에 적어 중국에 보낸 사건이다. 정약용 반대파는 “천 사람을 죽여도 정약용 한 사람을 죽이지 못하면 아무도 죽이지 못한 것과 같다”며 처형을 요구했다. 그러나 정약용 형제는 이와 무관함이 밝혀졌다. 죽음을 면한 이들 형제는 다시 유배길에 올랐다. 서울을 떠난 이들은 나주에서 헤어졌다. 형은 흑산도로, 동생은 강진으로.》

강진땅 18년의 시작
심한 소화불량 시달려… 차 벗하며 분노 삭여

새로운 만남

당대 학승 혜장-초의와 교류… 실용주의-애민사상 깊어가

새 길을 만든 그리움
유배 아픔을 학문으로 승화… 목민심서등 500여권 저술

○ 무너진 꿈, 낯선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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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의 처연한 뒷모습에 정조의 얼굴이 겹쳐졌다. 당파의 세력 갈등 때문에 늘 불안하고 조심스러웠지만 그 시절은 행복했다. 1789년 27세에 벼슬을 시작해 여러 관직을 거치며 1795년 정3품 당상관에 올랐다. 특히 정조의 신임은 각별했다. 하지만 모두 지나간 일이었다.

강진 사람들은 정약용을 받아주지 않았다. 여러 차례의 퇴짜 끝에 강진 동문 밖에 있던 주막집의 한 노파가 겨우 그를 받아 주었다. 낯선 땅, 엄혹한 현실. 정약용은 시를 지었다. ‘북쪽 바람 눈 휘몰듯 나를 몰아붙여/머나먼 강진 밥 파는 집에 내던졌구나.’

강진으로 유배된 다산이 처음 기거했던 사의재.
억울했지만 그는 죄인일 뿐. 정약용은 치욕을 견디고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약용은 이 집에 사의재(四宜齋)라는 당호를 붙이고 4년 동안 지냈다. 사의재는 ‘생각, 용모, 언어, 동작을 마땅히 바르게 하는 방’이라는 뜻. 그러나 치욕을 견디는 것은 쉽지 않았다.

1월 말 비 내리는 저녁, 사의재 옆에 복원해 놓은 주막을 찾았다. 사람들이 모여 막걸리잔을 기울이며 저마다 정약용을 얘기하고 있었다. 정약용 연구에 매달려온 양광식 강진군 문화재연구소장의 설명.

“명문가 출신에, 잘나가던 사람이 낯선 땅 강진에 왔으니 고생이 많았겠죠. 처음엔 화가 나서 먹으면 체하고 소화불량에 시달렸습니다. 그건 책에서 만나지 못했던 현실이었습니다. 진정으로 궁핍을 경험한 것이지요. 그는 차를 마시고 퇴계 시를 읽으며 조금씩 화를 삭여나갔습니다. 한 3년쯤 지나서 적응이 된 것 같습니다.”

정약용은 본격적인 공부와 글쓰기를 시작했다. 큰아들 학연에게도 편지를 썼다. “폐족일수록 좋은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 머릿속에 책이 5000권 이상 들어 있어야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느니라.”

○ 새로운 만남, 꿈을 세우다

1805년 겨울 강진의 보은산 고성암 보은산방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곳에 9개월 정도 머물며 아들 학연과 함께 주역 연구에 심취했다. 보은산에 올라 먼 바다를 내다보며 흑산도로 유배 간 형을 그리워하기도 했다. 인근 백련사로 건너온 당대 최고의 학승 혜장 스님도 만났다. 1806년 가을엔 제자 이학래의 집에서 기거했고 이어 1808년 봄 만덕산 다산초당으로 옮겼다. 만덕산은 차나무가 많아 다산(茶山)으로 불렸다. 정약용은 이 다산이 좋아 자신의 호를 다산으로 정했다.

다산은 이곳에서 1818년 해배(解配)되기까지 10년을 보냈다. 18명의 제자, 강진 사람들과 어울려 갔다. 제자들과 함께 초당에 정원을 꾸몄다. 마당에선 솔방울을 태워 차를 달이기도 했다. 그때의 차 부뚜막인 다조(茶조)가 지금도 다산초당에 남아 있다. 아전들의 탐학도 보고, 강진 백성들의 비참함도 목도했다. 그것은 강진과, 강진 사람과 하나가 되어 가는 과정이었다.

다산은 꿈을 좀 더 확고하게 세워나갔다. 본격적인 저술활동에 몰입한 것이다. 다산초당에 1500권의 책을 쌓아놓고 치열하게 읽고 생각하고 부지런히 썼다. 생각이 나면 수시로 기록하고, 기록하면서 새로운 생각을 이끌어내고, 그 생각을 다시 기록하고…. ‘목민심서’ ‘경세유표’ ‘아방강역고’ 등 그의 역저 500여 권은 대부분 만덕산 다산초당에서 태어났다. 양 소장은 “조선시대에 강진에 유배 온 사람이 100여 명이었는데 다산처럼 백성을 만나고 이해하고 기록한 사람은 없다”고 했다.

○ 그리움, 새로운 길이 되다

1월 말에 찾아간 강진 만덕산 백련사. 찻집 만경다설(萬景茶說)의 유리창 너머로 강진의 바다가 시원스레 펼쳐졌다. 다산은 백련사에서 혜장 스님과 차를 자주 마셨다. 혜장은 스님이었지만 불교뿐만 아니라 유학과 주역에 대한 지식도 깊었다. 다산은 백련사로 넘어와 열 살 연하의 혜장을 만나고 불교와 주역과 세상을 논한 뒤 다시 초당으로 돌아가곤 했다.

1811년 혜장은 3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 뒤 초의선사가 자주 그를 찾아왔다. 다산은 초의와 백련사에서 다산초당까지 걸었다. 초의와 함께할수록 혜장이 더욱더 생각났다. 다산은 혜장을 통해 실천의 중요성을 배웠고 초의를 통해 살아있는 정신을 만났다.

1813년 여름, 부인 홍씨가 해진 치마를 보내 왔다. 다산은 그 비단 치마폭 위에 그리움을 흠뻑 담아 그림을 그렸다. 매화꽃 핀 나뭇가지에 참새 두 마리…. 먼 데를 바라보는 참새 두 마리의 눈빛이 애처롭다. ‘매화쌍조도(梅花雙鳥圖)’다. 다산은 그림 밑에 사연을 이렇게 적었다. “강진에서 귀양살이 한 지 몇 해 지나 부인 홍씨가 해진 치마 6폭을 보내왔다. 너무 오래되어 붉은색이 다 바랬다. 그걸 오려 족자 네 폭을 만들어 두 자식에게 주고, 그 나머지로 이 작은 그림을 그려 딸아이에게 전하노라.”

백련사 찻집을 나서 다산초당 길로 들어섰다. 한쪽으로 동백나무 숲이 있고 한쪽으로 차나무 밭이 있는 곳. 그 길은 투명하고 적요했다. 해월루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았다. 흑산도로 유배 간 형 정약전을 생각했던 정약용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다산의 강진생활 18년은 온통 그리움이었다. 남양주에 두고 온 부인 홍씨와 자식들, 먼저 세상을 떠난 혜장과 정약전, 정조와 백성 그리고 역사의 진실까지. 백련사에서 다산초당으로 가는 길, 동백이 붉게 피었다.

강진=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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