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190· 끝>

  • 입력 2009년 9월 28일 13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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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오셨어요?"

드라마 <산악자전거>가 방영되는 동안에도 왕할매 이윤정은 라싸에 머물며 돌아오지 않았다. 강행군으로 촬영을 한 결과 심신이 피폐해져 요양 중이라는 풍문이 돌았다. 디지털 액터가 아닌 인간 배우로만 만든 드라마는 <산악자전거>가 마지막일 것이라는 평이 미디오스피어에 올라왔다.

"서울을 떠나기로 했다며?"

옆방에서 기다리던 앨리스가 세렝게티와 보르헤스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오다가, 윤정을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산악자전거> 정말 재미나게 봤어요. 힘드셨죠?"

"힘들긴 평생 해온 일인데……. 고생이야 남형사가 더 했지. 그래 몸은 어때? 이 녀석이 마음고생 시키진 않고?"

앨리스가 석범을 슬쩍 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고집불통이에요. 뭐든 꼭 혼자 끝낸 후에 보여주는 완벽주의잔 건 고모님도 아시죠?"

윤정이 검은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만큼 실눈으로 웃었다.

"그럼 그럼! 황소고집들이지. 손미주나 은석범이나 참 지독해. 이 지독한 녀석과 특별시를 떠나 시골에서 잘 지낼 수 있겠어?"

석범이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여긴 뭣 하러 오셨어요? 작별 인사 챙기는 분은 아니시잖아요?"

윤정이 웃음을 뚝 그치고 답했다.

"새 작품 의논하러 왔다."

"새 작품을 왜 저랑 의논해요? 그리고 옛날 방식으론 드라마 안 찍는다면서요?"

"헛소문이다! 난 또 시작할 거야. 이번엔 제목이 <눈 먼 시계공>이지."

"<눈 먼 시계공>은 1987년 리처드 도킨스가 쓴 책 이름 아닌가요?"

꺽다리 세렝게티가 기억력을 자랑했다.

"맞아. 하지만 내용은 전혀 다르지. 이 드라마의 핵심 인물은 은석범 검사와 남앨리스 형사고, 세렝게티와 보르헤스 두 분 연구원도 조연으로 등장해. 물론 진짜 주인공은 글라슈트겠지만. 연쇄살인과 뇌 과학과 로봇 격투기! 이 셋을 잇는 것만큼 드라마틱한 소재가 또 어디 있겠어? 나 이걸 하기로 했으니, 협조해줘."

석범이 양팔을 휘휘 저으며 반대했다.

"우리 이야길 하신다고요? 싫습니다."

"왜? 벌써 다른 감독이 다녀갔어? 딴 놈이랑 이걸 만들 생각은 마. 손미주와 은석범을 가장 잘 아는 내가 만들어야 이야길 제대로 풀 수 있다고. 안 그래?"

윤정이 고개를 돌려 앨리스에게 눈으로 도움을 청했다.

"글쎄요. 그게…… 그럼 인권을 잃는…… 제가 97퍼센트 기계몸이 되어가는 과정도 드라마에 나오나요?"

"당연히 다뤄야지. 어디까지 인간이고 어디서부터 인간이 아닌가는 특별시연합 의회에서도 논쟁이 계속되는 뜨거운 감자니까. 사랑 이야기도 듬뿍 넣을 거야. 은석범과 노민선의 사랑, 최볼테르와 서사라의 사랑 그리고 은석범과 남앨리스의……."

"저흰 제발 빼주세요."

앨리스가 말허리를 잘랐다. 윤정이 뒤에 선 늙은 사내들을 뒤늦게 소개했다.

"<눈 먼 시계공>을 함께 작업할 스토리 디자이너들이야. 여긴 착상에서 스토리보드까지 책임지는 그래픽 노블리스트 김한민 선생, 또 그 옆엔 신경과학의 권위자이기도 한 정재승 박사와 우주소설을 개척한 김탁환 작가! 늙은이들이라고 색안경 끼고 보진 마. 이래 뵈도 이태에 꼬박꼬박 장편 하나씩은 공동 작업으로 출간할 만큼 상상력도 풍부하고 순발력과 지구력도 대단하니까."

석범은 그들과 어색한 인사를 나눴다. 윤정이 계속 강하게 밀어붙였다.

"일주일만 시간을 내줘. 그 뒤론 괴롭히지 않을게. 내 드라마감독 인생에서 대미를 장식할 가장 멋진 작품이 될 거야. 하는 거지?"

석범이 앨리스에게 눈길을 주니, 그녀는 어깨를 으쓱 들어 올렸다가 내렸다. 알아서 판단하라는 뜻이다. 석범이 한숨을 내쉬었다.

"좋습니다. 왕고모 부탁이시니, 하지요. 잠깐만 남형사랑 얘길 나누겠습니다. 기다려주세요. 2분이면 됩니다."

석범은 앨리스와 함께 창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출구는 윤정을 따라온, 이야기에 대한 욕심이 검버섯처럼 얼굴에 덕지덕지 붙은 세 늙은이가 버티고 섰던 것이다.

"정말 하시려고요?"

앨리스가 묻는 순간, 석범이 빙글 몸을 돌리면서 강철구두로 벽을 걷어찼다. 그는 순식간에 뚫린 구멍으로 앨리스의 팔을 잡고 빠져나갔다.

"달려!"

이윤정과 김탁환과 정재승과 김한민 그리고 두 연구원이 따라 나왔지만, 석범과 앨리스는 벌써 까마득하게 멀어져가고 있었다. 전속력으로 질주하며 앨리스가 물었다.

"우리 지금 어디로 가는 거예요?"

석범이 답했다.

"눈보라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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