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 칼럼]아스팔트 우파

  • 입력 2009년 3월 15일 20시 01분


서정갑 대령연합회 회장(69)을 12일 만났다. 화병(火病)이 생겨 밤에 잠을 못 잔다는 그의 얼굴은 초췌해 보였다. 동네 한의사가 “화가 쓸개에 미쳤으니 만사를 잊고 그저 쉬라”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더라고 했다. 우리가 누구를 위해 싸웠는데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지,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치민다고 했다.

서 회장은 노무현 정권 말기이던 2007년 7월 특수공무집행방해 및 치상 혐의로 기소돼 작년 4월 1심에서 징역 1년 8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노 정권이 기세등등하던 2004년 10월 4일 서울시청 앞에서 국민행동본부 이름으로 ‘국가보안법 사수 국민대회’를 연 게 화근이었다. 대회 도중 경찰차의 백미러가 깨지고 전경 몇 명이 다치긴 했으나 사안이 경미해 당시엔 그냥 넘어갔다고 한다. 그러더니 3년이 다 되어서야 갑자기 기소하더라는 것이다. 기소야 그렇다 쳐도 어떻게 정권이 바뀐 지금 이럴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는 “경찰차 백미러 값이 84만 원”이라며 “84만 원 때문에 내가 이 꼴을 당해야 한다면 광우병 폭력시위로 서울 도심을 무법천지로 만들고, 경찰버스 120여 대를 파손하고 진압경찰 100여 명에게 중상을 입힌 사람들은 어떤 벌을 받아야 하는가”라고 되물었다.

항소심이 진행 중이지만 그는 이 정권에 대한 섭섭함을 감추지 않았다. 한나라당만 해도 널린 게 율사 출신 의원인데 무료변론 해주겠다고 나서는 사람 하나 없더라는 것이다. 그는 “노 정권에선 시국사건 재판이 벌어지면 열린우리당의 율사 출신 의원들이 떼로 몰려왔다”며 씁쓸해했다. 그와 그의 동료들은 대선 이후 청와대 행사에 한 번도 초대받지 못했다. 주위에서 청와대에 건의했더니 “극우라서 곤란하다”는 대답만 들었다고 한다.

청와대 “극우라서 곤란하다”

이 대목에서 참고 있던 다른 우파 인사가 폭발했다. “우리는 지난 10년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태극기를 붙들고 살았다. 우리가 조롱당하고 테러당할 때 침묵하고 눈치나 보던 사람들이 한 자리씩 꿰차더니 우리를 ‘극우’라며 외면한다. 억장이 무너진다”

그 심정을 이해할 만했다. 이것은 이념 이전의 문제다. 편하게 말한다면 정치든 인생이든 ‘극단(極端)’이 설 자리는 없다고 할 수 있겠으나 그것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서 회장부터가 지극히 평균적인 한국인의 삶을 살아 온 사람이다. 연세대 행정학과를 나와 학군장교(ROTC) 2기로 임관해 베트남전에 참전했고 육군본부 총무과장과 부관차감을 지냈다.

그를 보면서 나는 미국의 대표적 극우 인사인 러시 림보(58)를 떠올렸다. 라디오 시사 토크쇼 진행자인 림보는 미 전역에 걸쳐 600여 개의 라디오방송과 계약을 하고 매일 자신의 논평을 내보내는 우파의 우상과 같은 인물이다. 주중(週中) 청취자만 1350만 명으로 미 라디오 토크쇼 사상 최다를 기록하고 있다. 언행도 거칠고 과격하다. “미국의 흑인들이 뒤처지는 것은 버락 오바마 같은 흑인지도자들에 의해 어릴 때부터 미국을 증오하도록 훈련받았기 때문”이라고 쏘아붙일 정도다. ‘선동가’ ‘독설가’라는 비난도 받지만 헌법, 자본주의, 시장경제, 작은 정부, 법치, 국가안보 등 보수의 가치에 대한 그의 확고한 신념은 인정받고 있다.

이 점에선 서 회장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그런데 왜 림보는 ‘보수의 지도자’로 추앙받고, 서 회장과 그의 동료들은 같은 우파 정권조차도 부담스러워하는 존재가 된 것일까. 미국과 단순 비교할 수는 없겠으나 우리 사회는 전통적으로 극단은 피하려는 경향이 강한 데다 삶은 일신(一身)의 안락을 지향하면서도 의식은 언필칭 ‘진보’에 머물고자 하는 위선(僞善)이 구조화된 탓이라고 나는 본다. 보수에 대한 자기 확신이 없으니까 ‘튀면 죽는다’는 식의 처세(處世)의 도(道)가 이념을 앞선다. 이런 요인들이 ‘극우’(사실은 극우도 아니지만)를 자꾸 밀어내는 것이다. 실컷 이용만 하고서는 말이다.

愛國忠情이 제대로 전달되도록

서 회장과 그의 동료들이 억울해할 만하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고언(苦言) 한마디는 하고 싶다. 의심할 바 없는 그들의 애국충정이 혹여 본질과는 관계없는 것들, 예컨대 평소 사용하는 용어나 구호 같은 것들에 의해 빛이 바래는 경우는 없었는지 한 번쯤 돌아봤으면 한다. 아스팔트 위에서 죽도록 고생했지만 정작 그 열매는 다른 보수단체들이 따먹지 않았는가. 서 회장이 갈망하는 ‘보수혁명’의 완결을 위해서라도 이제 필요한 것은 치밀함과 유연함, 그리고 진화(進化)다.

이재호 논설실장 leejae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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