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 칼럼]남북관계 출구는 없는가

  • 입력 2009년 3월 1일 20시 00분


대남(對南) 협박에 열을 올리는 북한의 행태는 전형적인 노이즈 마케팅(noise marketing)이다. 시끄럽게 해서 주위의 이목을 끈 다음 뭔가를 좀 더 비싸게 팔아보려는 상술 말이다. 흔히 ‘소음 마케팅’으로 번역하지만 이 경우엔 ‘소음’보다 ‘소란’이 더 적합한 표현 같다. ‘초토화’ 운운하며 연일 미사일을 발사하겠다고 을러대는데 어찌 소음만 나겠는가.

새로울 것도 없다. 늘 쓰던 수법이다. 1993년 제1차 핵 위기 때도 북한은 ‘서울 불바다’ 발언과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로 한바탕 소란을 피워 ‘경수로 제공’ 약속을 얻어냈다. 2006년에는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으로 판을 키워 조지 W 부시 정부 후반기에 북-미 양자 협상의 길을 트는 데 성공했다. 앙앙거리면 항상 소득이 있다는 것을 북은 안다.

전문가들은 북한의 겁박에 대해 “버락 오바마 정부의 한반도 문제 해결 방식과 의지를 떠보고, 내부 결속을 다지기 위해서”라고 입을 모은다. 일리가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건강도 안 좋다고 하니 챙겨야 할 일이 좀 많겠는가. ‘노이즈 마케팅’은 이를 위한 가장 효과적이면서도 익숙한 방법일 터이다.

일각에선 “이명박 정부의 북한 무시(無視) 전략이 남북관계를 악화시켰다”고 비판한다. 심지어는 “모든 게 ‘비핵 개방 3000’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수긍하기 어렵다. 우리가 북에 대화를 구걸하고 좀 더 고분고분하게 굴었더라면 북이 미사일 카드를 꺼내들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천만에. 그렇지 않다는 것쯤은 누구보다 그들이 잘 안다.

또 ‘노이즈 마케팅’ 시작한 北

좌파는 북한이 미사일 발사를 강행하면 “거 봐라”며 또 한번 기세를 올릴 태세이지만 자가당착이다.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선 북이 미사일 발사도, 핵실험도 안했어야 했다. 대북 철학(햇볕정책)에 대한 집착 때문에 실상을 알면서도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틀린 줄 알면서도 지기 싫어서 끝까지 우기는 아이들처럼 말이다.

이 정부도 서툴렀다. 국민 대다수는 퍼주기 식의 대북 온정주의도 좋아하지 않지만 경제위기 속에서 남북 갈등이 심화되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 그렇다면 더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대화 의지를 보였어야 했다. ‘비핵 개방 3000’이란 구호만 만지작거렸지 상세한 액션플랜은 내놓지 않으니까 ‘대화 기피 정부’로 몰려 공매를 맞은 것이다.

남북대화가 어디 한두 번의 제의로 성사되던가. 이쪽이 제의를 하면 저쪽이 역(逆)제의를 하는 식으로 많게는 수십 차례의 제의가 오고간 뒤에야 남북이 접점을 찾고 마주 앉는 것이다. “진실성도 생산성도 없다”는 이유로 이런 과정을 무시하려 들면 대화 기피의 책임을 뒤집어쓰게 된다. 이것이 불행하게도 반세기 남북관계사의 교훈이다.

이제라도 몇 가지 점은 분명히 해둬야 한다. 우선 좌파는 북한의 미사일 위협을 이 정부와 보수 세력에 대한 공격의 빌미로 삼아선 안 된다. 북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선 눈을 감고 우리 정부나 우파만 공격하려는 드는 건 정상이 아니다. 북이 미사일을 이용해 인질로 잡고 있는 것은 미국도 일본도 아닌 한국이다. 북을 옹호하는 사람은 자신도 그 인질의 일부임을 직시해야 한다. 미사일과 핵에 관한 한 한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얘기다.

정부도 ‘대화의 유용성’에 대해 좀 더 유연한 사고를 가져야 한다. 어려울수록 대화의 끈을 놓아선 안 된다. 남북관계를 바로잡기 위해선 어느 정도의 경색기간은 불가피하나 대화의 문을 완전히 닫아버리면 상황 변화에 기민하게 대처하기 어렵다.

춘궁기 파종기 쌀·비료 회담부터

이 정부도 출범 1년이 지났으면 ‘비핵 개방 3000’을 포함한 대북정책의 크고 작은 구상을 실천에 옮길 때가 됐다. 그러려면 어떤 형태로든 대화는 이뤄져야 한다. 인도적 차원에서 북한에 쌀과 비료를 다시 지원하는 논의도 필요하다. 북은 올해도 춘궁기와 파종기를 앞두고 쌀과 비료가 부족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굳이 정부가 안 나서더라도 적십자사나 민간단체를 내세워 도울 수 있다.

이명박 대통령도 3·1절 기념사에서 “남북 간 모든 합의를 존중하겠다”고 거듭 밝힘으로써 대화 의사를 분명히 했다. 그렇다면 이제는 구체적인 방안을 내놓고 북한을 설득해야 한다. “대화의 문은 항상 열려 있다”는 식의 공허하고 소극적인 접근으로는 실질적인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북도 미사일 발사 포기로 이에 화답해야 함은 물론이다.

이재호 논설실장 leejae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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