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 리모델링]<3>건강의 재구성

  • 입력 2006년 1월 23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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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선현경
그림 선현경
“생각할수록 화가 나네.”

한약 찌꺼기가 달라붙은 남편의 서류가방을 손질하던 주부 강모(37·서울 강서구 화곡동) 씨가 손에 든 솔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무심했던 남편의 표정이 떠오르자 다시 울화가 치민 것.

부부싸움의 발단은 한약이었다. 얼마 전 강 씨는 남편의 몸이 많이 상한 것 같아 큰돈을 주고 한약을 지었다. 남편은 약을 싫어하는 눈치였다. 그래도 강 씨는 매일 아침 서류가방에 약을 넣으며 꼭 먹을 것을 강조했다.

바로 전날이었다. 남편은 한약을 먹지 않고 가방에 둔 채로 약봉지를 터뜨려 빨랫감까지 만들어 놓았다. 그러고도 “누가 약 달랬나?”라고 하는 게 아닌가.

○ 서로 건강 챙겨 주면 금실도 좋아져

중년으로 접어들면 누구나 건강에 신경을 쓰기 시작한다. 그러나 부부의 대응방법은 많이 다르다.

대체로 주부들은 강 씨처럼 남편의 건강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한다. 반면 남편들은 귀찮아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건강해 보자’는 취지가 변색돼 부부싸움으로 이어지는 사례가 적지 않다.

그러나 발상을 바꾸면 건강을 챙기는 노력 그 자체만으로도 부부 금실을 다지는 데 큰 도움이 되기도 한다. 경기 고양시 일산서구 일산동에 사는 직장인 최모(45) 씨 부부가 그런 사례다.

최 씨는 지난해 말부터 아스피린과 비타민을 매일 복용하기 시작했다. 부부가 함께 건강을 챙기자는 동갑내기 아내의 권유에서였다.

최 씨의 아내는 아침 식탁에 종지를 올려놓고 그 안에 약과 영양제를 넣어 뒀다. 최 씨도 처음에는 ‘한약사건’의 강 씨 남편처럼 아내에게 “약을 밥처럼 먹으란 말이냐”고 항의했다. 최 씨는 며칠 전 슬쩍 약을 주머니에 넣었다가 아내에게 들켜 혼이 난 적이 있다. 그 후로 최 씨는 아내와 약을 두고 실랑이를 벌이지 않기로 했다.

다만 요즘에는 약과 영양제 복용 시간대를 두고 옥신각신한다. 최 씨는 “아스피린은 아침에, 비타민은 저녁에 먹는 게 좋다”고 주장하고 아내는 “한꺼번에 아침에 먹는 게 좋다”고 반박한다. 그런데 최 씨는 이 같은 대화가 싫지 않다.

“전에는 아이들 얘기를 빼면 공통된 대화주제가 없었어요. 건강을 챙기면서 우리 부부 자체가 대화의 소재가 됐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많은 얘기를 하게 돼요. 아내나 저, 모두 만족하고 있어요.”(최 씨)

유독 전업주부가 암에 걸리는 TV 드라마가 많다. 실제로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전업주부가 건강의 사각지대에 처해 있다는 점에서는 곱씹어야 할 대목이다. 실제 남편은 직장에서 대부분 건강검진을 받지만 아내는 이상 징후가 생기기 전까지 가족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많은 의사가 아내에 대한 남편의 관심을 촉구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대기업 과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이모(44) 씨는 최근 건강검진을 받았다. 모두 정상치. 이 씨는 자신만 건강검진을 받았다는 미안한 생각에 아내를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이 씨는 아내의 건강검진 기록표를 보고 나서야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아내에게 무심했는지를 알게 됐다.

‘살이 좀 찐 것 같다’고만 봤던 아내의 체중은 63kg. 키가 160cm로, 체질량지수(BMI)가 24.6이 나왔다. 비만 위험 체중이었던 것이다. 이 씨는 아내가 체중 조절을 위해 그동안 1주일에 한 번 아파트 산책로를 따라 30분 정도 달리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도, 과식의 원인이 ‘가정주부로서 남은 음식이 아까워서’였다는 사실도 기록표를 보고 알았다.

이 씨는 의사의 권유에 따라 앞으로 매년 아내의 고혈압과 당뇨, 콜레스테롤을 체크하고 유방암 검사를 받게 할 작정이다.

○ 무심한 남편들이여, 아내를 돌아보라

이처럼 부부가 함께할 때 질병을 조기 발견할 수 있는 기회는 커진다. 함께 살면서 생활습관과 식습관, 운동행태 등이 비슷해지기 때문에 자신의 습관에서 배우자의 습관을 유추해 보자.

실제 배우자가 같은 병을 가질 확률이 높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연세대 예방의학과 김현창 교수는 최근 1998∼2001년 국민건강 영양조사 자료를 바탕으로 전국 3141쌍의 부부를 조사한 결과 대사증후군을 가진 사람의 배우자 또한 같은 병을 가졌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대사증후군이란 심혈관계질환의 위험 요인이 동시에 나타나는 것. 보통 △허리둘레가 남자 90cm, 여자 80cm를 초과 △공복 혈당이 dL당 110mg 이상 △혈압이 수축기 130, 확장기 85mmHg 이상 △중성지방이 dL당 150mg 이상 △고밀도 지단백질(HDL) 콜레스테롤 수치가 남자는 dL당 40mg, 여자는 dL당 50mg 미만 등에서 3가지 이상 해당되면 대사증후군으로 분류한다.

분석 결과 남편이 대사증후군일 때 아내가 같은 또래의 여성에 비해 대사증후군에 걸릴 위험은 32%, 그 반대의 경우는 29%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김상훈 기자 corekim@donga.com

▼전문가 시각▼

가족 관계와 사회적 지지는 건강에 전방위로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가족 중에서 특히 배우자가 사회적인 지지의 가장 중요한 원천이 된다. 약 6000명의 성인을 대상으로 9년 동안 지켜본 한 연구에 따르면 그 개인의 사망을 예측하는 데 그 사람의 사회경제적 상태와 건강 상태, 건강 습관 실천에 관계없이 사회적 연결망이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 결국 좋은 부부 관계와 친지 친구와의 밀접한 접촉이 가장 강력한 건강의 결정 요소이다.

부부끼리 서로 닮는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질병을 일으키는 원인에서도 적용된다. 부부가 동맥경화 위험 요인을 같이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무척 높은 확률이다. 예를 들면 혈압, 콜레스테롤 수치, 혈당, 흡연 여부, 운동 실천 여부 등이 그러한데 이는 서로 습관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같이 살다 보면 먹는 습관이나 운동, 수면 습관 등이 비슷해진다.

부부간의 이런 동질성을 잘 이해하면 만성병 치료에 강력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남편이 운동을 시작하면 아내도 같이 운동 프로그램에 가입하게 되고, 부부가 모두 담배를 피울 경우 한 사람이 금연을 시도할 때 함께 참여함으로써 치료 효과를 높인다.

콜레스테롤이 높거나 당뇨병 때문에 식사를 조절해야 할 때 부엌살림을 하는 배우자의 도움 없이 이루어지기는 힘들다.

당장 싱겁게 먹어서 염분을 줄여야 하는데 언제나 음식을 짜게 만들어 내놓는다면 치료가 힘들 것은 뻔한 일이다.

약물 치료도 마찬가지인데 배우자가 함께 고혈압 교육을 받고 치료에 개입할 때 약물 복용과 체중 조절을 더 잘해서 결과적으로 고혈압 치료가 더 잘되었다는 연구도 있다.

그래서 가족, 특히 배우자는 병을 치료하는 의사의 든든한 원군이 되고 때로는 의사보다도 더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부부는 서로의 건강 지킴이로 좋은 역할을 하고 힘이 되기도 하지만, 잘못되면 건강을 해치는 나쁜 환경을 유지하는 온상이 되거나 스트레스를 일으키는 가장 큰 원천이 되기도 한다. 부부 건강은 서로가 힘이 되는 쪽으로 가야 하는데 이는 질병이 없을 때 미리 나쁜 습관을 찾아내고 건강할 수 있는 행동을 함께 실천해 나가는 데서 시작된다. 질병이 생기더라도 배우자가 환자를 지지해 주고 이해해 준다면 병의 회복과 조절에 큰 도움이 된다. 부부 사이에 각자의 건강은 서로의 거울이 된다는 점을 잊지 말자.

이정권 교수 성균관대 의대 삼성서울병원 가정의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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