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고싶은 남자들]<6·끝>당신에게 그런 아픔이…

  • 입력 2005년 9월 3일 03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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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문턱, 이 사회의 벼랑 끝에 서 있는 중장년 남성들의 자화상을 담은 ‘울고 싶은 남자들’ 시리즈를 읽으며 문득 한 장면을 떠올렸다. 몇 년 전 뉴욕의 어느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할 때였다. 나이 많은 ‘할머니’ 웨이트리스들이 빵과 수프를 날라 주던 그 식당 풍경을 의아하게 바라보고 있을 때 옆 사람이 귀띔을 하는 것이었다. 뉴욕에는 혼자 사는 중년 남자가 많다 보니 이렇게 가정의 따스함을 느낄 수 있는, 할머니들이 일하는 식당이 의외로 인기라는 것이었다. 어쩌면, 가장의 책임을 홀로 짊어진 채 힘들게 현대 사회를 살아온 중장년 남성들은 어느 정도씩 서로를 닮은 외로운 얼굴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

어느 사회에서든, 전통 가치에 안주해 새로운 가치관을 채 준비하지 못한 남성들은 그저 넋을 잃고 그 혼란함을 따갑게 직시할 수밖에 없다.

특히 우리나라의 중장년 남성들 대부분은 가부장적 가치관 아래 성장한 세대다. 이들은 가부장적 가치의 안락과 혜택을 더 누리지 못하고 변화된 가족 형태 사이에 끼여 당황하고 있는 것이다.

가부장적 사회의 모순이라든가 여성 차별에 대한 수많은 논의는 일단 접어 두자. 이번 ‘울고 싶은 남자들’ 시리즈 속에 나타난 우리 사회 중년 남성의 쓸쓸한 모습들은 때로는 안쓰러웠고, 그들이 그렇게나 외롭고 허전하게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은 안타까웠다.

일찍이 그들이 꿈꾸었던 남성상은 힘과 권위와 성취였다. 하지만 이 사회는 그들을 경쟁과 스트레스 속에 살아가는 나약한 돈벌이 노동자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그래도 그들은 가장으로서 아내를 거느리고, 자신의 대를 이어갈 자식을 위해 일을 하며 희생을 기꺼이 감수하는 것을 보람으로 알았다. 하지만 지금 허탈감과 소외감에 빠져 있다.

티베트 고원의 사내들은 이런 중년의 나이가 되면 아내와 자식에게서 벗어나 비로소 한 인간으로 출가를 단행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중장년은 생물학적 나이의 성인(成人)뿐만 아니라, 진실로 정신의 어른이 되어 가는 나이라는 것이다.

시리즈를 읽고 나서 우리 사회 중장년 남성들에게 가장 해주고 싶은 말은 ‘남성은 강하다’라는 생각에서 과감히 해방되라는 것이다. 그리고 자식이건 아내건 독립 개체라는 것을 평화롭게 받아들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래야 스스로도 당당하게 늙을 수 있고, 서로 이해하는 진정한 남편과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가령 친가 쪽 중심의 가족관계가 처가 쪽으로 기울어 가는 것을 보더라도 건강한 균형을 잡아 가는 것이라고 담담히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원래 가정(familia)이란 말의 뜻은 우리들이 이상으로 삼는 행복의 쉼터를 지칭하는 뜻이 아니었다고 한다. 결혼한 부부와 자녀들을 지칭하는 것도 아니었으며 단지 가내 노예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고 한다. ‘파밀리아’란 한 남성에게 속한 노예들의 총수를 의미했다는 것이다.

오늘날 가정을 이런 의미로 생각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가정의 뜻과 의미, 형태는 끊임없이 변화해 왔다. 이 복잡한 시대에 옛날 형태의 가정만을 행복의 이상 형태라 믿는 것은 무리다. 가장의 권위 아래 식구들이 둘러앉아 식사를 하고 순종과 위계로 효를 실천하는 형태가 아닌, 다른 가치와 다른 형태의 행복을 새로 창출해야 하지 않을까.

어른을 귀하게 모시고 서로 화합하는 풍습은 이어 가야 하지만, 너무 혈연을 강조하고 또 자식에게 독립심을 길러 주지 못한 채 끝없는 재정적 뒷받침을 해주며 이를 애정의 증표로 착각하는 일은 단연 없어져야 할 것이다.

남녀는 대립과 적대의 관계가 아니며 가족도 상하우열의 관계가 아니다. 남성과 아버지가 행복해야 여성도 가족도 함께 행복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중장년을 위한 사회적 시스템 구축과 시대에 맞는 아버지와 남편에 대한 가치 정립, 그리고 서로 간에 진정한 이해의 폭을 한층 넓혀야겠다는 것도 절감했다.

힘과 관계에만 몰두하던 시선을 내면으로 돌려보면 의외로 가슴속에 넓은 초원이 있을지도 모른다. 거기 아직 늠름하게 한 사나이가 서 있을지도 모른다.

중장년의 나이란 물리적인 힘으로 외적 세계에 개입하는 나이가 아니라, 내적인 정취나 희열로도 성취가 있다는 것을 배워야 하는 나이다.

문정희 시인

▼정신과 전문의가 본 ‘위기의 중년’▼

‘울고 싶은 남자들’ 시리즈를 읽으면서 한국의 남자들이 정말 힘들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정말 한국의 남자들은 그 어느 때보다 어려운 시절을 살고 있다. 총체적 난국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요즘 남자들은 맘 놓고 쉴 곳, 맘 놓고 위로받을 곳이 없다. 회사는 물론이고 가정에서도 자리가 없다. 어디에서도 우군을 찾기 힘들다.

남자들이 원해서 지금의 처지가 된 것은 아니다. 그동안 대다수의 남자는 묵묵히 가정을 지키고 열심히 일만 했다. 그래서 지금 자신의 처지가 억울하다. “왜 나를 이렇게 홀대하는가?”라고 한탄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이 ‘단순함’이 부메랑이 돼 남자에게 돌아온 것은 아닐까.

필자는 스트레스 클리닉을 운영하는데 상당수 환자가 중년 남성이다. 회사에서 치이고 집에서 치여 소위 ‘화병’을 얻은 사람도 많다. 면담을 해 보면 대부분 회사 생활을 성실하게 했고 가정에도 충실하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다만 일이 생각대로 안 풀려서 병을 얻게 되는 것이었다.

그런 환자 중 상당수는 변화에 대한 적응력이 크게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사회의 변화에 둔감해지고 그에 따라 더욱 과거에 집착하는 경향이 강했다. “우리 때는 안 그랬는데 요즘에는…” 식의 한탄이 늘어난다. 그러나 그 같은 한탄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시 남자들이 ‘대접’을 받으려면 스스로 바뀌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여기서 ‘대접’이란 과거의 권위주의적 의미를 말하는 게 아니다.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과 조화롭게 어울리는 것을 뜻한다.

우선 ‘모름지기 남자란…’으로 시작하는 낡은 문구부터 버려야 한다. 그 문구가 남자 스스로에게 족쇄를 채우기 때문이다. ‘남자는 평생 세 번만 울어야 한다’는 따위의 말은 다 잊어버리자.

남자들도 아줌마들의 수다를 배워야 한다. 정신의학적으로 봐도 수다와 유머는 가장 좋은 스트레스 해결책이다. 수다는 감정을 가장 잘 표현하는 도구이기도 하다. 남자들이여, 이제 감정을 충분히 표현하자. 울고 싶으면 실컷 울어도 된다.

힘들다고 말할 줄도 알아야 한다. 가장(家長)은 늘 꼿꼿해야 한다는 편견부터 버려야 한다. 당신의 아내와 아이들도 때로는 도움을 요청하는 남편과 아빠를 바라고 있다.

많은 여성들이 “나만의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남자도 마찬가지다. 혼자 생각에 잠길 수 있는 공간을 요구하자. 요컨대 분명하게 의사 표현을 해야 한다는 얘기다.

가족들의 따뜻한 애정과 배려도 필요하다. 남자들의 한숨에 “자업자득”이라고 차갑게 쏘아붙이고 싶은 아내, 자식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말은 그렇게 내뱉을지라도 차가운 눈빛, 닫아 버린 마음의 문 앞에서 돌아서는 자기 아버지의, 자기 남편의 휴지처럼 구겨진 어깨를 보며 쓰라림을 느끼지 않을 아내와 자식은 많지 않을 것이다.

설령 가부장적인 모습으로 군림했던 과거를 가진 가장일지라도, 가족을 위해 자신의 젊음을 바쳤던 그들의 헌신마저 없었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사소한 일상에서 가족의 작은 배려, 친근한 말 한마디에도 천군만마를 얻은 듯 마음속으로 기뻐하며 소리 없이 웃는 사람들, 그게 남자다.

남성이 ‘대장’으로 군림하던 시절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미래의 리더는 남녀의 구분이 없다. 조화로운 남성상을 새로 만들어가는 데도 사회 전체가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다.

우종민 인제대 서울백병원 신경정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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