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칼럼/박명진]역사에 발목 잡힌 日 문화외교

  • 입력 2005년 6월 17일 03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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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과연 ‘소프트파워’ 혹은 ‘쿨(cool)파워’로 세계의 리더가 될 수 있을까?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는 2년 전 기술 분야에서뿐만 아니라 패션, 음식, 오락문화 등 대중문화 영역의 매력을 이용한 문화외교로 일본의 위상을 재정립하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총리자문 대외문화정책 그룹의 수장인 다모쓰 아오키 교수는 최근 요미우리신문 인터뷰에서 9·11테러 이후 심화된 세계 갈등의 대안으로 ‘평화 일본’과 ‘중립적 가치’를 지닌 일본 대중문화를 제시하고 있다. 베토벤 음악이 독일의 전유물은 아니듯이 일본 대중문화도 국경을 넘는 세계의 문화로서 평화의 사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 대중문화의 세계적 성공에 힘입은 자신감의 표현일 수 있겠다.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 게임은 세계 청소년들에게 ‘쿨’한 문화로 사랑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미국 다음의 대중문화 수출국이 된 일본은 문화에 새로운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1970년대부터 순전히 돈벌이로 시작한 일본의 대중문화 수출이 1990년대 초엽부터는 일본정부에 의해 정치적이고 이념적인 사명까지 부여받기 시작했다. 대중문화를 ‘정치화’하기 시작한 첫걸음이 일본 대중문화에 빗장을 걸어 온 아시아 국가들의 문을 여는 것이었고, 한국을 비롯한 여러 아시아 국가에서 일본문화 개방이 이뤄졌다.

서양의 문화평론가들은 일본을 ‘문화적 프리즘’이라고 표현해 왔다. 다른 나라의 문화를 흡수해 약간의 일본 취향의 굴절을 거친 뒤 다시 반사해 낸다는 것이다. 이 문화적 프리즘은 굳이 문화의 뿌리를 따지거나 민족문화의 순수성을 지켜야 한다는 자의식 때문에 괴로워하지도 않는다. 문화 생산이 일종의 시뮬레이션 작업과도 유사하다.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외국 예술가들의 전문 박물관 역시 일본이 아니면 보기 어려운 풍경이다. 만일 우리나라에서 누가 그런 박물관을 세우려 한다면 ‘제 것도 챙기지 못하는 주제에’ 하는 눈 흘김을 당하지 않을까?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기를 끌고 있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만화영화만 해도 그렇다. 관심의 포인트가 각기 다르겠지만 나는 ‘하울의 성’을 봤을 때 여기저기서 많이 봐 온 서양문화 이미지의 편린들을 짜깁기해 낸 것 같아 놀랐다. 그러고도 자기 것을 풀어내듯 태연하게 해내고 있어 능청스럽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짜깁기 방법 자체가 독창적이라고 주장하면 할 말은 없지만, 일본식 ‘문화 프리즘’의 절정으로 보였다. 그러나 여기에 ‘동양 문화’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세계화 시대에는 그처럼 다양한 문화를 합성한 짜깁기 문화나 프리즘 문화가 친근하고 잘 먹히는 것 같다. 국가 간, 문화 간 교류가 활발해진 요즘 젊은이들의 체험과 욕구를 잘 충족시켜 주는 모양이다. 여러 나라 사람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문화적 자의식이 강해서 자기 것이 아니면 문화 예술적으로 표현해 내지 못하는 쑥스러움을 일본은 갖고 있지 않다. 일본에는 외국 문화가 남의 문화가 아니다. 남의 것을 자기 것처럼 표현할 수 있는 프리즘적 능력이 일본 문화의 강점이다.

과연 세계를 구할 수 있는 글로벌 문화가 그런 프리즘 문화인지는 알 수 없다. 여하튼 9·11테러 같은 충돌이 다시 일어나지 않으려면 미국식 하드파워가 아닌 평화를 지향하는 일본식 쿨파워가 세계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하는 방법이라는 확신과 함께 일본은 대중문화로 세계의 리더를 꿈꾸는 것 같다.

그러나 그런 일본식의 평화는 설득력이 있는가? 최근에 실시된 한국일보와 요미우리신문의 공동 여론조사에 따르면 일본을 믿지 못하겠다는 한국인이 응답자의 90%에 달했다. 일본 정부가 그간 꾸준히 추진해 온 문화외교의 성과가 이 정도다. 문화외교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문화외교가 침략전쟁의 역사에 발목 잡혀 그런 것이리라. 역사를 순리로 풀어가지 않는 한 일본의 ‘쿨’한 문화가 평화의 사도 역할을 해내기는 어려울 것 같다. 평화는 시뮬레이션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박명진 객원논설위원·서울대 교수·언론학 mjinpark@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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