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화 두소리]‘밀리언 달러 베이비’를 보고

  • 입력 2005년 3월 16일 16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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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튜브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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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회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 여우주연상, 남우조연상을 거머쥔 ‘밀리언 달러 베이비’. 아카데미는 왜 20세기 초 ‘젊었던’ 미국의 야망을 그려낸 마틴 스코시즈 감독의 대작 ‘에비에이터’를 두고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만든 가난한 여자 복서와 늙은 트레이너 이야기에 손을 들어 준 것일까. 그러나 ‘한 영화 두 소리’의 부부 영화평론가 심영섭 씨와 남완석 교수(전주 우석대)도 이번만큼은 아카데미와 같은 편이었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가 참 오랜만에 보는 스토리와 기본에 충실한 좋은 영화”라는 데 모처럼 ‘한 영화 한목소리’를 냈다.》

○ 과잉이 없는 이스트우드의 미학

▽남완석=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말년에 만드는 영화들은 할리우드가 가장 좋아하는 요소는 다 갖고 있는 것 같아. 장르 영화의 규칙을 어느 정도 지키면서도 그걸 좀 넘어서서 인간 혹은 인생에 대해 철학적 얘기를 하지. 그에 비해 스코시즈 감독은 영화적으로 훨씬 뛰어난 감독임에도 현실을 파헤치는 쪽에 치중하는데 그게 할리우드 구미에는 안 맞는 것 같아.

▽심영섭=난 기본적으로 이스트우드 영화의 기반이 ‘가족주의’라고 생각해. 이스트우드는 보수주의자야. ‘밀리언 달러 베이비’도 유사 가족, 즉 아버지와 딸의 이야기지. 그게 아카데미에 계속 먹히는 것 같아.

∇남=‘가족 중심의 보수주의’라는 게 그의 한계가 되기도 해. 이스트우드 영화를 보면 인물이나 스토리가 중심이 되고 기법상 실험은 아주 제한적이거든.

∇심=거기에 대해선 생각이 다른데…. 난 이스트우드가 존 포드, 장 르누아르를 잇는 살아 있는 최고의 미국 고전주의, 자연주의 감독이라고 생각해. 그의 영화에서 신비로운 건 과잉이 없다는 거야. 그가 영화미학을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야. 오히려 알면서도 버리는 거지. 그의 컷들은 일견 소박하고 별 게 없어 보여. 그런데 벽돌 하나하나 쌓아올리듯 종국에 가서는 장중하고 압도적인, 인간 본성을 관조하는 통찰력 있는 영화를 만들어 내지.

∇남=내 생각엔 그러한 연출을 택한 건 이스트우드 자신이 영화인, 또는 배우로서 살아 온 과정의 결과물인 것 같아. 마카로니웨스턴에서 시작해 더티하리까지 그의 캐릭터엔 약간은 차가우면서도 유머러스한 반(半)영웅적 요소가 있었어. 하지만 후반기로 갈수록 미국 역사의 격랑 속에서 스러져가는 어떤 비애와 깊이가 있는 캐릭터로 변모해 가. 날이 갈수록 원숙해져, 이스트우드는.

∇심=그래서 이스트우드를 두고 ‘할리우드의 기적’이라고들 하잖아. 난 그 기적이 자기가 해 왔던 것을 반성하고 고찰할 줄 아는 데서 가능했다고 생각해. 그가 만든 영화 속 주인공들은 세상과 소통이 단절돼 있는데, 그건 깊은 죄의식 때문이지. 그의 첫 아카데미 감독상 수상작인 ‘용서받지 못한 자(Unforgiven)’를 보아도 주인공 윌리엄 머니는 총잡이로서 과거의 자신에 대해 깊은 부채의식을 갖고 있어. 그건 영화감독으로서 자신의 출생지인 서부극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물어오는 과정에서 보여준 태도야. 그래서 그는 늙어갈수록 영화를 잘 만들어. 참 놀라운 일이지. 그 점에선 난 전 세계 감독들이 그를 본받을 만하다고 생각해.

○ 복싱영화를 넘어선 링의 드라마

▽심=위대한 미국 남성 마초 감독들은 다 복싱영화를 만들고 싶어했던 것 같아. ‘분노의 주먹’을 만들었던 스코시즈가 그랬고, ‘알리’를 찍은 마이클 만 감독이 그렇고…. 그 감독들은 사각의 링을 ‘도망갈 곳 없는 정글’로 그렸지. 심지어 최근의 한국영화 ‘역도산’까지도… 그런데 이스트우드는 그걸 넘어서서 말해. 이 영화의 목적은 화려한 복싱 연출에 있지 않아. 그가 자신의 선수인 매기에게 말하는 건 바로 ‘자기 자신을 보호하라’야. 그거야말로 자식에게 부모가 해 줄 수 있는 최상의 애정 표현 아닐까. 그런데 인생은 그렇지 않잖아. 인생은 너무 모호하고 새옹지마 투성이에 부모가 대신 싸워줄 수도 없어. 때론 알 수 없는 심연 같은 데 빠지고.

▽남=왜 프랭키는 계속 성당 미사에 참여하고 신부를 찾아갈까. 프랭키가 링에서 피 흘리는 사람을 지혈하는 세컨드라면, 신부는 영혼의 지혈을 하는 사람이지. 상처 전문이라는 점에서는 동업자인 셈이야. 처음 매기(힐러리 스웡크)가 안락사시켜 달라고 요구했을 때 그는 거절하지. 하지만 그녀가 자살하려고 혀를 깨물자 프랭키는 마침내 그녀의 소원을 들어줘. 매기가 피 흘리는 순간… 그가 행동할 때, 즉 지혈할 때가 온 거지.

▽심=그래서 죄의식이나 용서 못지않게 이 영화의 중요한 주제가 ‘상처’야. 단 한번의 빅 클로즈업이 바로 한 권투선수가 눈가에 입은 상처를 확대한 거였어. 이스트우드 영화의 주인공들이 입는 상처는 보통 돌이킬 수 없는, 너무 뼈에 가까워서 지혈이 안 되는 그런 종류지. 그런 상황에서 인간이 인간에게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이스트우드는 얘기해. 챔피언이 된 매기의 대전료가 왜 100만 달러일까? 그건 팁 몇 센트로 근근이 살아가던 매기가 100만 달러짜리가 됐다는 게 아냐.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바로 매기와 프랭키의 관계가 100만 달러짜리가 됐다는 게 중요한 거야.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근원은 바로 서로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집중, 사각의 링에서도 오로지 서로의 목소리만 들을 수 있는 집중이라는 거지. 여기서 100만이라는 숫자는 단 하나의 언어로 바뀌어. ‘모쿠슈라’(나의 소중한, 나의 혈육)로….’

○ 빛과 음악, 목소리로 빚어낸

단단한 영화

▽심=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형식적 요소가 빛이라는 생각 안 들어?

▽남=어둡지. 콘트라스트가 강하고…

▽심=영화 속 인물들이 맞는 중요한 계기, 관계는 모두 어둠 속에서 진행돼. 프랭키가 매기의 트레이너가 되기로 약속하는 장면, 프랭키가 매기를 안락사시키는 장면… 모두 어둡지. 대신 잔인한 장면들, 매기가 링에서 쓰러지거나 매기의 가족들이 매기에게 강제로 유산상속을 받으려는 장면들은 모두 대낮의 밝은 빛 아래서 이뤄져. 그가 인간의 심연을 영화의 조명으로 처리했다는 생각이 들어.

▽남=스토리의 장중함이 주는 무게를 음악의 절제가 배가시키지. 모두 이스트우드 자신이 만든 거잖아. 그는 재즈광인 데다 스코시즈의 ‘블루스’ 다큐멘터리 시리즈의 하나인 ‘피아노 블루스’도 감독했어.

∇심=음악 못지않게 이 영화의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 1인칭 내레이션이야. 대부분의 내레이션은 주관적이거나 감정적이어서 유치해지기 쉬운데 모건 프리먼의 대사는 관조적이고 철학적이야. 영화 전반부의 즐거움은 ‘복싱엔 존경이란 게 있어. 자기 것을 지키며 상대에게서 그걸 뺏는 거지’ ‘복싱에 있어 기적이란, 참는 데 있다. 어떤 고통이 와도 참고 견디며 갈비뼈가 나가고 망막이 터져도 싸운다는 거지. 자신만 볼 수 있는 꿈 때문에 모든 걸 거는 거야’ 같은 프리먼의 명대사를 듣는 데 있어.

▽남=자, 그러면 이 영화가 영화사에 길이 남을 걸작이 될까? 당신 생각은 어때?

▽심=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영화사에 길이 남을 작품을 만들겠다고 생각한 것 같지는 않아. 프랭키가 챔피언 조련사가 아니라 상처를 다루는 데 최고인 세컨드였던 것처럼, 그는 그냥 자기가 아는 것을 말해주고 그 안에서 살아가려 하는 분수를 아는 사람일 뿐이야. 베스트 인 세컨드…. 어쩌면 인생에선 오만한 퍼스트보다 가장 훌륭한 세컨드가 소중한 것 아닐까.

정리=정은령 기자 r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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