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기술 어떻게 됐나]아라미드 펄프

  • 입력 2005년 3월 3일 18시 5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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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미드펄프 샘플을 1000배 확대해 촬영한 모습. 고온과 마모에 강한 미세 섬유구조물들이 잘 형성돼 있다.
아라미드펄프 샘플을 1000배 확대해 촬영한 모습. 고온과 마모에 강한 미세 섬유구조물들이 잘 형성돼 있다.
《‘세계 최초로 기적의 섬유 아라미드펄프 신공정 개발.’ ‘국내 최초로 세계적인 과학전문지 네이처에 논문 게재.’ 한국의 과학기술이 세계 수준에 이르고 있는 요즘 그다지 낯설지 않은 표현들이다. 하지만 무려 20여년 전에도 이런 연구성과가 있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윤한식(76) 박사가 화제의 주인공이었다. 1982년 3년의 연구 끝에 내열성이 뛰어난 아라미드펄프를 새로운 방법으로 개발한 것.》

윤 박사가 소개한 합성공정은 당시 이 분야를 주도하던 미국의 듀폰과 네덜란드의 악조의 관심을 끌었다. 특히 듀폰은 두 차례나 한국을 방문해 아라미드펄프의 ‘물질특허’ 소유권을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국내 코오롱이 물질특허 소유권을 갖고 세계 각국에 특허 등록을 마쳤으며 1984년 KIST에 석좌기금 3억원을 기탁해 후속 연구를 지원했다. 당시로서는 몇 년 안에 세계 섬유시장을 석권한다는 기대감이 컸다. 하지만 2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 우리의 아라미드펄프는 상품으로 출시되지 못했다.

윤 박사는 그 이유를 한 마디로 “기술이 시대를 너무 앞섰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실험실 수준에서 연구는 성공했지만 대량생산에 필요한 막대한 인력과 시설을 감당하기 어려웠다는 것.

윤 박사는 1979년 ‘듀폰의 케블라 섬유 개발’이란 기획서를 제출하고 연구에 몰두했다. 케블라는 듀폰이 개발한 아라미드펄프의 상품명으로 마모가 잘 안 되고 고온에 견디는 능력이 뛰어나 자동차나 엘리베이터 등 ‘브레이크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사용될 수 있다. 특히 기존에 같은 용도로 사용되던 석면이 발암물질로 판명되면서 현재 아라미드펄프는 석면을 대체할 유일한 소재로 인식되고 있다.

아라미드펄프(바깥)로 만든 자동차용 브레이크 패드(안쪽). 아라미드펄프는 브레이크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적용되는 재료다. 사진 제공 코오롱

윤 박사는 듀폰보다 훨씬 간편하게 아라미드펄프를 만들었다. 아라미드펄프의 재료인 ‘실’의 분자들은 자연 상태에서 서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듀폰은 실 분자에 황산을 처리하고 가는 구멍으로 뽑아내는 방식으로 실을 만들었다. 이에 비해 윤 박사는 마치 양털처럼 분자들이 자연스럽게 성장하면서 실이 형성되는 방법을 찾았다. 윤 박사의 이 연구성과는 ‘네이처’ 1987년 4월 9일 주요논문으로 게재됐다.

하지만 상업화는 달성되지 못했다. 당시 연구에 참여한 영남대 섬유패션학부 손태원 교수는 “무엇보다 아라미드펄프에 특정 화학원료 두 가지가 필요했는데 이를 위해 국내에서 원료공장 두 개를 짓기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웠다”고 말했다.

또 코오롱 K2태스크포스팀 김두현 부장은 “실험실 수준에서 성공한 방법으로 대량생산을 유도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며 “하지만 그동안 꾸준히 연구를 지속해 상업화에 한 발 다가선 새로운 특허를 몇 차례 획득했다”고 말했다. 현재 코롱은 듀폰의 제조방법과 윤 박사의 연구성과를 결합한 새로운 생산공정을 정립해 올해 안에 성과물을 낼 계획이다. 20여년 전 세계를 놀라게 했던 우리의 과학적 성과가 조만간 상품으로 등장할 날을 기대해본다.

김훈기 동아사이언스 기자 wolf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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