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과의 대화]최재천/성탄선물로 받은 ‘이공계 살리기’

  • 입력 2003년 12월 24일 18시 5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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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 아침 산타할아버지로부터 아주 좋은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았다. 워낙 더덕더덕 욕심이 많은 사람인지라 양말을 세 개씩이나 걸어두었는데 양말마다 골고루 좋은 선물을 넣어주셨다. 교회 목사님께서 늘 기도는 구체적으로 하는 것이라고 하셨기에 조목조목 바랐는데 죄다 들어주셨다.

양말 속의 선물은 다름이 아니라 지난 몇 년간 이 땅의 과학기술인들이 줄기차게 요구해 온 이공계 살리기 방안의 대부분이 새해엔 모두 실행된다는 희망의 메시지였다. 그동안 과학기술인들이 마련해 온 이공계 살리기 대책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먼저 과학기술인들의 신분 보장과 사기 진작을 위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나는 이를 ‘과학기술인의 행복지수’ 개선방안이라고 부른다. 다음으로 시급한 것은 지속적인 과학기술 발전을 위한 국가제도 또는 사회 인프라의 구축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러나 결코 덜 중요하지 않은 것이 바로 대국민 홍보전략의 수립이다.

얼마 전 미국의 과학학술지 ‘사이언스’는 우리나라가 몇 년 전 외환위기를 겪을 때 특히 과학기술인들이 대거 실직한 점을 이공계 기피 현상의 주요 원인으로 지적했다. 경기가 나빠지면 전문성이 결여된 관리직이 먼저 해고되는 외국의 경우와 너무나 다르다. 기초과학기술인 양성에 더 이상 어쭙잖은 시장원리를 적용해선 안 된다. 기초과학의 수요는 정부가 직접 나서서 적극적으로 창출해야 한다. “그랜저 타는 나이가 한의대는 30세, 의대는 35세지만 공대는 45세이고 자연대는 영원히 못 탄다”는 우스갯소리의 숫자들이 어느 정도 비슷해져야 한다. 새해에는 우리 정부가 과학기술인의 행복지수를 획기적으로 향상시킬 정책들을 주위의 눈치 보지 않고 과감하게 실시한다는 선물이 첫 양말 속에 들어 있었다.

대학원 박사과정의 지원을 외국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현재는 BK21 프로그램에서 월 60만원 정도의 장학금을 받는 게 국내 최고 수준인데 이는 사립대학의 경우 등록금을 내기에도 부족한 액수다. 적어도 월 150만원 정도는 돼야 할 것이다. 이와 함께 국내 박사를 일류대학 교수로 채용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 국내 대학원에 활력을 불어넣어야 한다. 이제는 국내에서 학위를 받아도 충분히 국제경쟁력 있는 논문을 발표할 수 있다. 국내에서 학위를 받는 것과 외국 유학을 하는 것의 결정적인 차이는 외국대학에서는 장학금을 받으면 오로지 학업에만 몰두할 수 있지만 국내에서는 그러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공계 학생들을 위한 가히 획기적인 지원책이 두 번째 양말 속에 있었다. 그 양말 속에는 국가 과학인구의 저변 확대를 위해 그동안 미뤄오던 국립자연사박물관은 물론 소외됐던 기초과학 분야의 국가연구소 건립 계획도 들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과학기술인의 삶을 긍정적으로 홍보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과학을 알리는 일에 뛰어들 홍보 대사들의 희생이 너무 크다. 그래서 나는 오래 전부터 이른바 ‘과학문화 석좌교수제’를 제안해 왔다. ‘과학문화 국가교수’라고 해도 좋다. 그것은 연구업적의 절반 정도를 과학홍보 업적으로 대신할 수 있게 해주는 제도다. 우리 과학계에도 과학을 알리는 일이 연구업적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인식을 확고하게 해줄 장치가 필요하다. 과학문화 국가교수라는 당당한 멍석이 깔리면 자신의 연구에 약간의 피해가 있더라도 기꺼이 과학홍보 사업에 시간과 노력을 투자할 재능 있는 과학기술인들이 얼마든지 있다. 내가 벌써 몇 년째 부르짖고 있는 이 제도가 새해에는 교육인적자원부와 과학기술부 공동으로 드디어 시행된다는 소식이 세 번째 양말 속에 들어 있었다.

사실 위의 세 가지 선물은 내가 개인적으로 지난 몇 년간 언론이나 강연을 통해 밝힌 정책 제안의 일부에 대한 응답일 뿐이다. 단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나온 아이디어가 이만할진대 지금까지 각종 토론회나 위원회에서 논의된 제안들을 다 모으면 그 안에 해답이 있을 것은 너무도 자명하다. 이젠 공론을 멈추고 실행에 옮길 때가 됐다. 새해엔 우겨서 억지로 받은 이 선물들을 진짜 손에 꼭 쥐었으면 한다.

최재천 서울대 교수·생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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