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지배구조]<8>기업생존 좌우하는 CEO리더십

  • 입력 2003년 8월 24일 17시 4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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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속인터넷 업체인 하나로통신의 최고경영자(CEO) 집무실은 최근까지 4개월가량 주인을 맞지 못했다.

3월 주주총회장에서 3연임이 힘들어진 신윤식(申允植) 전임 회장이 사임하면서 CEO 없는 경영공백이 빚어졌던 것. 경영난에 빠진 하나로통신으로서는 CEO의 리더십이 절실했지만 주주사간의 이해가 엇갈리면서 차일피일 미뤄졌다. 경영난 타개를 위한 외자유치와 신규사업추진 등 현안이 해결될 리도 만무했다. 우여곡절 끝에 정보통신정책연구원(KISDI) 원장 출신의 윤창번(尹敞繁) 사장이 취임했지만 하나로통신의 시장 내 입지는 몇 개월 사이 더욱 위축됐다.

지금도 진행 중인 미국의 반도체 업체 AMD의 CEO 승계 과정은 이와 사뭇 대조적이다. 창업자 제리 샌더스 회장은 64세였던 2001년 자신이 1년 뒤 퇴진할 것을 예고하고 후계자로 헥토 루이즈 사장을 지명했다. 루이즈 사장은 발표가 있기 1년 전 샌더스 회장이 후계구도를 염두에 두고 모토롤라에서 스카우트해온 인물이었다. 루이즈 사장은 예고대로 지난해 4월 샌더스 회장으로부터 CEO직을 물려받았다. 그는 올 들어 인텔보다 앞서 64비트 마이크로프로세서 시장에 뛰어드는 등 활약을 펼치고 있다. 샌더스 회장은 루이즈 사장의 ‘CEO 수습’ 기간이 끝나는 올해까지만 회장직을 유지할 계획이다.

▽후계자 양성은 CEO의 책무=CEO의 리더십은 기업의 성장은 물론 생존까지 좌우하는 핵심 요소다. ‘CEO 주가’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유능한 CEO를 발굴해 경영권을 효율적으로 승계하는 것은 주주나 이해 관계자들의 주요 관심사다. CEO가 선발되는 과정은 기업지배구조의 핵심요소 중 하나다.

이데이 노부유키 소니 회장은 1995년 이사에서 CEO로 발탁됐다. 이데이 회장을 발탁했던 오가 노리오 전 회장은 “내가 결정했던 일 가운데 가장 잘 한 것은 이데이를 후계자로 지명했던 것”이라고 회고했다. 이데이 회장은 변화를 꿰뚫는 동물적인 후각을 바탕으로 가전 회사인 소니를 첨단 디지털 기업으로 탈바꿈시켰다.

GE의 잭 웰치 전 회장의 후계자 선발 작업은 94년부터 7년여에 걸쳐 지속된 것으로 유명하다. 2001년 취임한 제프리 이멜트 회장은 15명의 CEO 후보를 3명으로 압축하고 다시 최종후보를 가리는 엄격한 검증과정을 거친 뒤에야 CEO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철저한 사전훈련과 엄격하면서도 투명한 선발절차를 거칠수록 유능하고도 올바른 CEO가 탄생할 가능성은 높아진다. 구학서(具學書) 신세계 사장은 “유능한 CEO를 길러 안정적으로 경영권을 승계하다보면 기업지배구조도 저절로 투명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그룹은 ‘왕자의 난’을 겪으면서 위상이 크게 약화됐다. SK그룹의 후계자인 최태원 회장의 구속 사태는 원활하지 못했던 CEO 승계 작업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공기업이나 은행의 경우 권력에 의한 낙하산 인사가 종종 문제되곤 한다. ‘대물림’식 승계에도 위험이 따를 수 있다. 특히 지분이 많지 않은데도 억지로 대물림 하려다가는 탈법을 저지르기 쉽다.

“후계자를 선정하는 기준은 그 사람의 능력이지 오너의 아들이냐 아니냐가 아니다. 오너의 아들이라고 불리한 대접을 해서는 곤란하지만 특혜나 출세를 보장해도 안 된다.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빨리 출세시키지 않는 게 본인을 위해 좋다.”(소니의 이데이 회장)

도미니크 바튼 매킨지 서울사무소 대표는 “꼭 가족승계를 해야겠다면 어렸을 때부터 체계적인 관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미국 일본 유럽 등에서 가족기업이 3세대 이상 유지될 가능성은 13∼20% 정도다.

▽CEO 승계 프로그램을 도입하라=각 기업들은 CEO 후계자를 양성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앞다퉈 도입하고 있다. 내부 인재를 발굴해 유능한 CEO를 양성하는 작업이야말로 기업가치를 높이는 수단임을 간파했기 때문.

“일본 소니 회장실에는 세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이 붙어 있다. 한 사람은 현직 회장, 또 한 사람은 전임 회장이다. 나머지 한 사람은 누굴까? 답은 ‘차기 회장’이다. 차기 회장이라는 직책은 없지만 반드시 그 사람이 회장이 된다. 다음엔 누가 회장직을 승계할지 투명한 것이다.”(구학서 신세계 사장)

소니는 10년 뒤 회사경영을 맡길 사장 후보 발굴을 목표로 CEO와 핵심경영진이 참여하는 경영인적자원위원회를 운영하고 있다. 위원회는 매년 2번 개최돼 세계 각국에 근무하는 18만명에 달하는 사원 가운데 간부 후보를 추려낸다. 여기서 선발된 후보자들은 본사 소니대학에서 연수를 받으면서 ‘미래의 소니 사장’의 꿈을 키운다.

GE 크로톤빌은 CEO 후계자 양성학교로 유명하다. 제프리 이멜트가 이 학교를 거쳐 잭 웰치의 후계자가 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

캐나다의 3대 은행 중 하나인 임페리얼 은행은 현지 CEO가 매년 몇 명의 내부 후보자 리스트를 이사회에 제출하면 이사회 멤버들이 그들을 관찰한 뒤 최종 선임여부를 결정한다. 미국의 자동차 부품회사 델파이는 이사회 차원에서 회사 조직 내에 여러 단계마다 잠재적인 경영자를 관리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한 LG는 매년 계열사의 모든 임원을 평가해 그 결과를 CEO 선발 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고강식 탑경영컨설팅 대표는 “한국 기업들은 최근 들어 지배구조 개선에 관심을 쏟고 있지만 후계자 양성에는 여전히 소홀하다”고 지적했다.


김태한기자 freewill@donga.com

▼現CEO, 차기CEO 육성 책임 ▼

박내회 서강大교수

“최고경영자(CEO)에게는 임기중 자신보다 능력있는 차기 최고경영자(CEO) 후보를 많이 육성해야 할 책임이 따른다.”

박내회(朴乃會) 서강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당대에 아무리 성공한 CEO라도 임기 중 능력있는 후계자를 길러내지 못하면 기업의 생존마저 위협받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제때에 후계자를 양성하지 않으면 위기관리 능력이 떨어져 순식간에 몰락할 수 있다는 설명.

그는 최근 제주에서 열린 전경련 하계포럼에서 기업인들을 상대로 “유능한 CEO라면 퇴임 3년전에는 적어도 3명 이상의 CEO감을 확정해야 한다”는 지론을 폈다.

기업들이 CEO 교체 과정에서 위기를 겪는 이유에 대해 박 교수는 이렇게 설명한다.

“회사가 가장 필요로 하는 유능한 인물을 선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CEO가 퇴진한 뒤에야 새로운 후보를 물색하면 부적격자를 선정할 위험이 높아진다. 후보 선정 과정이 너무 오래 걸리면 후보간에 알력이 생겨 조직이 와해된다. CEO가 자신의 성과를 빛내줄 후계자를 찾는데 급급하거나 퇴임 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도 금물이다.”

그는 후계자를 양성하는 데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고 설명했다. 직원들을 서로 경쟁시켜 적자생존 원칙에 따라 뽑는 경쟁방식과 일찌감치 후보자를 확정해 CEO가 후견인 역할을 하며 육성하는 릴레이방식이다. GE의 잭 웰치 전 회장은 경쟁방식으로 제프리 이멜트를 후계자로 선발했고, 코카콜라의 로베르토 고이주에타 전 회장은 경영 수업을 시키던 후임자에게 회장직을 물려줬다는 것.

박 교수는 “한국 기업은 CEO 후계자 양성 시스템이 취약하다”고 지적했다.

“CEO의 퇴진이 확정되면 비로소 차기 CEO를 찾기 시작하는 상황에서는 시장의 신뢰를 기대하기 어렵다. 어떤 후계자 육성법이 좋을지는 각 기업이 결정해야 한다. 어떤 방식이 되든 최종 선정의 절대적인 판단기준은 ‘능력’이어야 한다.”

외부에서 CEO를 영입하는 것은 어떨까.

“가장 바람직한 CEO 승계 구도는 내부에서 육성한 후보 중에서 후계자를 뽑는 것이다. 하지만 내부승계가 어렵거나 비상시에는 외부로 눈을 돌릴 수 있다. IBM 루 거스너 전 회장은 외부에서 발탁됐지만 회사를 침몰 위기에서 구했다.”

박 교수는 특히 한국 기업의 경영권 대물림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선진 기업 중에도 포드, 애버트 등은 가족구성원 중에서 후계자를 뽑고 있다. 그러나 능력과 자질을 충분히 검증받아야 한다. 지분도 넉넉히 있어야 한다. 가족구성원의 CEO 승계가 필요하다면 후계자를 어렸을 때부터 체계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무능한 후계자로의 경영권 상속은 회사에는 치명타가 된다.”

김태한기자 freewil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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