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보기 세상읽기]전장같은 시장…패자에도 갈채를

  • 입력 2003년 2월 7일 18시 1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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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위기는 한국사회의 진행방향을 바꾸고 수많은 개인의 평안한 삶을 일순간에 불행으로 뒤집었지만, 경제학자들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그 당시 경제학자들은 위기를 제대로 예측하지도, 자신 있는 처방을 내놓지도 못했다.

자신이 배우고 연구한 이론들로 눈앞의 경제 현실이 왜, 어떻게 무너지고 있는지조차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한다는 무력감은 각자에게 학문적 정체성의 위기이기도 했다.

이제 대다수 경제학자의 연구자세, 연구경향 및 주제는 크게 달라지고 있다. 아마도 이 경제위기의 경험은 다음 세대 학자들에게까지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이다.

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외환위기 터널을 지나면서 한국사회가 집단적으로 겪고 있는 그 고통이 시장이라는 특정한 경제형태의 산물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혔고, 경제적 관점이 아닌 다른 관점, 예컨대 윤리적 또는 도덕철학적 관점에서도 시장을 보아야 하지 않는가 싶었다. 그때 읽게 된 책이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이었다.

이 책은 19세기 영국 사회가 인류역사상 최초의 진정한 시장사회가 확립되는 거대한 전환기라는 역사해석을 담고 있다. 이 해석 자체는 실증적으로 뒷받침되지 못한다는 평가가 이미 내려져 있지만 많은 사람이 주목한 것은 폴라니의 시장개념이었다.

그가 말하는 ‘자유방임적 시장’은 인간(노동) 자연(토지) 화폐라는 세 가지 허구적 상품이 전제될 때 성립된다. 공동체적 삶의 구성요소인 이것들의 상품화는 인간의 공동체적 본성을 부정하고 말살시킬 때에만 가능하며 그렇기 때문에 허구적이라는 것이다.

또 인간의 공동체적 본성은 그것이 본성인 한 결코 항구적으로 부정될 수가 없다는 점에서 자유방임적 시장 역시 항구적으로 존속할 수 없다. 그래서 자유방임적 시장이 확대 심화될수록 공동체적 기반이 붕괴될 것이고 그에 따라 비등점처럼 일정한 경계를 넘어서면 공동체의 반격(사회의 자기보호)이 개시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시장과 사회공동체 간의 ‘이중 운동’이며, 그는 19세기와 20세기의 역사는 이중운동의 전개과정으로 해석한다. 또한 자유방임적 시장이 더불어 사는 인간들의 삶을 파괴하고 인간성을 거역하는 힘이라는 점에서 이를 비윤리적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나의 방식으로 해석하자면, 폴라니가 인간의 공동체적 본성만을 승인하면서 이기적 본성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개인주의적 기독교 구원 사상 그리고 초기 카를 마르크스가 끼친 영향 등에 비춰볼 때 그가 꿈꾸는 것은 아마도 개인과 공동체의 완전한 조화일 것이다. 극단적 개인주의 위에 세워진 극단적 시장이 아닌, 사회공동체 속에 깊이 뿌리내린 시장이 그의 대안인 셈이다.

폴라니의 눈을 빌려보면 외환위기 이후 한국사회의 자유시장으로 질주는 위태롭기 짝이 없다. 이제 모든 개인은 시장이라는 전장에서 혼자 맨몸으로 생존투쟁을 벌이지 않으면 안 되게 됐다. 시장탈락자에게는 사회적 관심과 배려가 사실상 부재하고, 이제 개인이 시장에서 달아나 숨을 수 있는 마지막 남은 공동체는 그나마 빠르게 약화되고 있는 가족관계뿐인 것 같다. 어떤 때는 이렇게 해도 사회가 유지될까, 이런 사회가 과연 도덕적으로 정당한 사회일까 싶기도 하다. 경제학자의 냉정한 계산으로는 결코 쉽지 않은 요원한 일이라는 걸 잘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장이 보다 순화되고 또 국가가 시장열패자를 적극적으로 끌어안고 보호하게 되기를 희망해 본다.

김균 고려대 교수·경제학 kyun_ki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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