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상인의 미국 바로보기]한인교회의 ‘작은 정부’

  • 입력 2001년 12월 18일 18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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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방문한 미국인들이 강한 인상을 받는 장면 가운데 하나는 서울 야경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십자가 숲이라고 한다. 교회가 많기로 말하자면 미국내 한인 사회도 마찬가지다. 10만 명이 조금 넘는 교포가 살고 있는 이 곳 시애틀 인근에도 한인교회의 숫자는 200개에 가깝다. 물론 교회의 많고 적음을 무슨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겠는가. 또한 고국을 떠나 외롭고 힘든 이국생활에서 같은 동포끼리 공유하는 종교생활을 누가 시비하랴. 하지만 ‘규모의 경제’ 에 미달해 존립이 불안한 한인교회가 적지 않은 현실 속에서 교회의 양적 성장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은 결코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한국문화 정부 대신 전수▼

이같은 현상을 불교나 천주교 등 다른 종교에 비해 유독 개신교 신자들이 미국 이민에 많이 몰린 결과로 해석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한 그것이 입교 절차가 비교적 간소하고 교회의 신규 설립도 상대적으로 용이한 개신교의 특성 때문이라는 주장도 피상적일 뿐이다. 신자 확보를 위한 치열한 상호경쟁이 빚어질 정도로 한인교회가 양적으로 늘어나게 된 진정한 까닭은 대다수 미국 교민들의 일상적 이민생활 자체로부터 연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교회를 비롯한 각종 한인 종교단체는 단순한 신앙공동체의 역할에 머물지 않는다. 공항 영접에서부터 거주지 알선 혹은 취업 주선에 이르기까지 이민자들의 초기 정착과정을 부모처럼 돌보는 경우가 많을 뿐만 아니라, 교민 2, 3세들에게 한국어를 보급하고 한국문화를 전수한다는 점에서 모국 정부가 해야 할 일을 대신 수행하기도 한다. 또한 미국의 입장에서도 마이너리티 교회는 소수인종을 미국 사회에 동화시키면서 동시에 간접적인 통제까지 기대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된다. 이런 점에서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미국내 한인 교민사회는 중세 봉건제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미국 정부가 행사하는 속권(俗權)과 한인교회가 발휘하는 교권(敎權)이 공존하고 있다는 뜻에서이다.

그러나 한인 교회가 수적으로 번창하는 또 다른 이유는 한국사람끼리 ‘마음놓고 떠들며 폼과 무게를 잡을 수 있는’ 일종의 해방구가 제공되기 때문일 것이다. 기왕 이민까지 온 처지에서도 한국사람들이 한국적인 것에 배타적으로 집착하는 것에는 확실히 유별난 대목이 있어 보인다. 예컨대 한국 슈퍼에서 한국 소주나 맥주까지는 팔 수 있다고 치자. 하지만 생수 혹은 심지어 양주까지 국산을 고집하는 교민이 결코 적지 않다는 사실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 무엇보다 자기를 ‘알아주고 모시는’ 한글·한인 전용의 한국교회는 당연히 필요하지 않겠는가.

흥미로운 것은 미국 물을 마시고 미국 말에 능숙한 전문직 종사자들에게도 한인교회는 나름대로 중요하다는 점이다. 미국에서 유능한 의사나 교수, 혹은 변호사로 평가받는 한국인들은 너무나 많다. 그리고 그들 스스로가 자부하는 정체성은 당연히 그들의 직업이나 직장에 연관된 것이다. 그러나 한 개인의 대표적 지위는 결코 당사자의 선택이 좌우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들이 일의 세계로부터 벗어나는 순간, 의사나 변호사의 지위로부터 동양인이나 한국인의 신분으로 ‘전락’ 할 개연성은 매우 높다. 만약 이 때 그들에게 한인사회나 한인교회가 없다면 새로 구입한 고급 승용차나 최근에 맞이한 예쁜 며느리를 도대체 어디에서 유감없이 자랑한단 말인가.

▼소수인종 동화에 큰 역할▼

이처럼 한인교회는 주중이 아닌 주말, 노동이 아닌 여가의 영역을 중심으로 교민사회에 상징적 의미와 이면적 질서를 부여한다. 그리고 현재 속한 교회 사정이 이래저래 여의치 않을 경우 교회의 ‘핵분열’ 이 쉽게 진행되는 것은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다. 제사보다 젯밥에 대한 관심이 더 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습은 교민사회의 각종 단체장 선거에서도 반복된다. 미국에 이민 와서 수 십 년 동안 열심히 노력한 결과 수영장 딸린 저택에 살면서 자식을 아이비리그 대학까지 보내기는 했지만, 정작 자신의 ‘허전한 명함’ 을 달랠 길 없어 무슨 한인회장, 무슨 협회 회장, 무슨 동문회장 자리에 그토록 안쓰럽게 목을 맬 수밖에 없는 것과 똑같은 이치의 발현인 셈이다.

(한림대 교수·현 워싱턴대 교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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