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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범기자의 애니인물열전]<홍길동>의 신동헌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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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범기자의 애니인물열전]<홍길동>의 신동헌 감독

입력 2001-01-12 15:40수정 2009-09-21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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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기대산업'이라며 애니메이션에 대한 '장미빛 찬가'가 울려퍼진지 10년이 다 돼간다. 그동안 몇 번의 좌절과 침체가 있었지만, 아직도 애니메이션의 미래에 대한 믿음은 확고하다. 하지만 그런 기대와 믿음과 달리 우리는 그 미래를 어떻게 열 것인가에 대해 여지껏 방향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다만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애니메이션은 여전히 사람놀음이라는 것이다. 손으로 일일이 그림을 그리든, 아니면 첨단의 컴퓨터로 기막힌 3차원 영상을 구현하든, 결국 그것을 만드는 것은 사람의 열정과 아이디어이다.

'애니 인물열전'은 바로 애니메이션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중에는 탁월한 작가정신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애니메이션 감독도 있고, 또 미래의 거장을 꿈꾸는 당찬 20대도 있다. 기발한 상상력으로 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낸 애니메이터가 있는가 하면, '귀로 듣는 애니메이션'을 추구한 히사이시 조 같은 음악가도 있다. 애니메이션에 자신의 꿈과 정열을 쏟는 이들의 이야기를 앞으로 소개한다. (편집자)

- 신동헌, 최초의 한국 장편 애니메이션 <홍길동>의 감독.

검은 베레모와 굵은 뿔테 안경. 둥근 얼굴에 늘 소년같은 미소를 짓는 신동헌 감독의 모습은 60∼70년대 만화에 등장하는 예술가의 모습 그대로이다. 27년생이니 올해로 74세. 인생의 흐름과 깊이를 아는 '고희'의 나이이다.

'애니 인물열전'의 첫 순서로 그를 소개하는 것은 한국 애니메이션의 흐름을 이야기하는 데 있어 신동헌을 빼놓고 절대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 최초로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을 감독한 주인공이다.

하지만 만화가로,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뚜렷한 족적을 남겼던 그가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은 애니메이션과 거의 연을 끊고 산다. 지금 신동헌 감독은 애니메이션 감독보다는 클래식 칼럼니스트로, 일러스트레이터로 더 유명하다.

60년대 아무런 기반도 없던 어려운 시기에 국산 애니메이션 제작에 헌신했던 그가 지금 이렇게 물러나 있는 것은 왜 일까?

* 빈손으로 이룬 신화, <홍길동>

지금부터 34년 전인 67년 1월21일은 한국 애니메이션사에 한 획을 그은 뜻깊은 날이다. 바로 첫 장편 애니메이션인 <홍길동>이 서울의 '세기' '대한', 부산의 '문화' '동보', 광주의 '시민' 등 이른바 일류 극장에서 동시에 개봉한 날이기 때문이다. <홍길동>은 상영 나흘만에 전국적으로 10만명에 달하는 관객이 몰릴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관객이 하도 몰리자 극장측은 관객 500명당 한 명을 뽑아 설탕 한 푸대씩 경품으로 제공하기도 했고, 몰리는 인파로 교통혼잡이 일자 기마경찰이 정리에 나서는 등 큰 화제를 모았다. 이 해 <홍길동>은 극장흥행 2위에 올랐고, 비(非)극영화 부문 대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제는 아련한 전설처럼 들리는 <홍길동>의 성공담. 그 중심에 바로 신동헌 감독이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와 동생 신동우 화백이 신화의 주인공이다. 형은 감독을, 동생은 작품의 원화와 구성을 담당한 형제의 활약은 67년 8월에 개봉한 속편 <호피와 차돌바위>까지 이어졌다.

형제 만화가로 유명한 두 신씨 형제는 함경북도 회령 출신이다. 일곱 아들 중 동헌이 다섯 번째, 동우가 막내이다. 27년 4월1일생인 신동헌 감독은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특출한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46년 홀로 월남한 이후 서울대 건출과에 다니던 그는 대학시절 아르바이트로 충무로에서 초상화를 그렸다. 이때 우연히 <코주부>의 작가 김용환을 만났고, 그것이 그의 인생에서 큰 전환기가 됐다. 신동헌은 김용환이 49년 <만화뉴스>를 창간할 때 전속작가로 채용됐고, 이후 시사만화가로서도 이름을 떨쳤다.

하지만 일찌감치 극화, 아동만화, 시사만화 등 다양한 장르를 섭렵했던 신동헌은 만화가로서는 동생 신동우보다 이름이 덜 알려졌다. 만화 외에 클래식에도 조예가 깊은 것을 비롯해 다방면에 재능이 너무 많은 것이 오히려 만화가로서의 대성을 막았다고 할까. 하지만 그는 자신의 집에 만화교실을 열어 후배들을 지도했는데, 이때 그의 밑에서 공부한 작가들이 오룡, 이재학, 김삼, 방영진, 신능파(넬슨 신이란 이름으로 애니메이션 제작) 등이다.

* "야-야-야-야, 차차차"라는 후렴구로 유명한 '진로 소주' CF

신동헌이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명성을 떨치게 된 것은 60년 CF 감독으로 활동하면서부터이다. 특히 그의 CF 감독 데뷔작이자 최고의 히트작으로 꼽히는 '진로소주' CF는 지금도 광고PD 사외에 회자되는 걸작. 익살스런 표정의 캐릭터와 술집의 흥겨운 분이기를 간결하면서 경쾌한 동작으로 표현한 그림, 그리고 흥겨운 차차차 리듬으로 "너도 진로, 나도 진로 야-야-야-야, 차차차"라는 후렴구로 유명한 CM송 등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애니메이션의 모든 요소가 잘 갖춘 CF였다.

이후 그는 닭표 간장, 애경유지 등 애니메이션 수많은 애니메이션 CF를 제작하며 독보적인 경지를 이룩해 갔다. 그가 불모지였던 장편 애니메이션에 도전할 수 있었던 것도 CF감독을 하면서 쌓은 경험과 노하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시대를 너무 앞서간 인물.

<홍길동>이 등장하기 전까지 한국에서 극장용 장편은 아무도 엄두를 낼 수 없는 '불가능의 영역'이었다. 작업을 해본 인력도 없었고, 촬영기를 비롯한 장비도 전무했다. 이런 상황에서 신동헌은 불가능에 도전했다. 그는 동생 신동우 화백이 '소년조선일보'에 연재하던 만화 <풍운아 홍길동>을 원작으로 삼아 제작에 들어갔다.

필름이 부족해 미군 항공정찰용 필름을 양잿물에 씻어 사용했고, 애니메이션에 필수적인 셀이 부족해 나중에는 미군 부대에서 사용하던 비닐을 구해 썼다. 애니메이션용 포스터컬러가 없어 일반 포스터컬러를 썼다가 그림을 망친 적도 여러 번. 최소한 200명이 동원되야 하는 장편 애니메이션을 불과 20명의 인력으로 도전했다. 애니메이션용 촬영 장비도 없어 기존 영화촬영기를 개조해 사용하는 등 맨주먹으로 작업을 했다. 그 결과 당시 국내 영화 10편을 만들 수 있는 5,400만원의 제작비와 12만 5300장의 셀을 사용한 <홍길동>이 탄생했다.

흔히 <홍길동>을 한국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이라는 역사적 가치로만 평가를 하는데, <홍길동>은 사적인 의미 외에 작품적인 면에서도 많은 의미를 지닌 작품이다.

그는 <홍길동>을 디즈니를 비롯한 미국 애니메이션처럼 1초에 24장의 그림을 사용하는 '풀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했다. 데즈카 오사무가 인력과 경비를 절약하기 위해 그림수를 12장 내지 8장으로 줄인 '리미티드 애니메이션'으로 애니메이션을 제작한 것과는 반대의 길을 택한 것이다.

또 지금도 비용이 많이 들고 까다로워 미국의 메이저급 제작사만이 사용하는 프레스코 기법(성우의 목소리를 먼저 녹음하고 나중에 그림을 그리는 방법)을 67년 당시 애니메이션 제작에 도입했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대작으로 꼽히는 <아키라>가 약 13만 5000장의 셀을 사용했다는 점을 따진다면 <홍길동>의 완성도는 거의 경이적이라고 할 수 있다.

* 얄팍한 장삿속이 한국 애니메이션의 싹을 밟았다

<홍길동> <호피와 차돌바위>가 그처럼 큰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신동헌은 70년대 들어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과 거리를 두었다. TV 시리즈 제작에 관여도 하고, 일본 애니메이션의 하청작업을 하기도 했지만,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을 직접 제작하지 않았다.

두 편의 작품이 잇달아 흥행에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애니메이션을 떠나게 된 것은 세상사에 어두운 그의 형제를 이용한 제작사의 얄팍한 계산때문이었다.

애니메이션이 성공을 거두자 제작사는 이를 제작에 재투자하기 보다는 한 푼이라도 더 챙기는데 혈안이 됐다.

신동헌은 두 편의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고도 흥행 성공에 대한 보상을 거의 받지 못했다. 작품의 판권도 그에게는 전혀 없었고, 돈 벌 궁리만 하던 영화사는 <홍길동>의 원본도 제대로 관리를 하지 않았다. 그 결과 <홍길동>은 포스터만 남아있고 필름은 행방을 감춘 '전설'이 됐다.

철저하게 이용만 당했다고 느낀 신동헌은 애니메이션 제작 풍토에 환멸을 느껴 충무로를 떠났다. 그후 애니메이션 제작사 '유니버설 아트'를 인수했다가 실패하는 등 그는 그리 순탄치 않은 길을 걸었다. 한때 미국의 애니메이션사에서 근무하기도 하고, 80년대 한국에 돌아와서는 대원동화의 회장직을 잠시 맡기도 했다. 95년 그는 돌꽃 컴패니에서 제작하는 <홍길동>에 총감독으로 참여를 했다. 하지만 제작사와의 갈등, 일본인 감독을 영입하는데 따른 불협화음이 겹치면서 손을 뗐다.

현재 그는 애니메이션이 아닌 클래식 음악 컬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각종 음악전문지에 연주회장 스케치나 음악가의 일러스트와 함께 쓰는 그의 글은 음악에 대한 깊은 이해와 따스한 정이 담겨져 있어 인기가 높다. 일산의 음악감상실 <돌체>에 가면 지금도 매주 토요일 '토요음악회'의 진행을 맡는 그를 볼 수 있다.

칠순이 넘은 그가 이제 현업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기를 바라는 것은 사실 무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국 애니메이션의 역사를 새로 썼다고 할 수 있는 그가 명예로운 은퇴를 한 것이 아니라, 치졸한 장삿속 때문에 후회와 환멸을 안고 등을 돌렸다는 것은 우리 애니메이션계가 입은 정말 아픈 상처중 하나이다.

김재범 <동아닷컴 기자> oldfie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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