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문 보도… 내 생애 이런 신문을 다 보는구나 했다”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3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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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100년을 준비합니다 / 내 삶속 동아일보]
<1> 박종철 死因 증언했던 오연상 원장

《1920년 4월 1일 창간한 동아일보는 100년의 역사를 이어오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과 인연을 맺었습니다. 그 인연은 때로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기도 했고, 사회에 희망을 북돋기도 했습니다. 여러 인물들이 돌이켜보는 지난날의 기억과 미래에 관한 당부를 ‘내 삶 속 동아일보’ 시리즈를 통해 만나봅니다.》

서울 용산구 옛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 시사 증언이 실린 동아일보(1987년 1월 17일자)를 든 오연상 원장.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서울 용산구 옛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 시사 증언이 실린 동아일보(1987년 1월 17일자)를 든 오연상 원장.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살렸어야 했는데….”

33년 전 그날을 기억하며 오연상 오연상내과 원장(63)은 끝내 눈시울을 붉혔다. 1987년 1월 14일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 이미 숨이 끊어진 박종철 씨(당시 22세)에게 한 시간 가까이 심폐소생술을 했던 기억이었다. 당시 중앙대용산병원 전문의였던 오 원장이 대공분실에 부랴부랴 도착했을 때 박 씨는 이미 동공이 풀리고 맥박과 호흡이 끊겨 있었다. 오 원장은 16일 진료실을 찾아온 기자에게 자신이 목격한 진실대로 ‘물고문’을 강력하게 시사하는 증언을 했다.

그의 증언은 다음 날 “좁은 수사실 바닥에 물기, 왕진 갔을 땐 숨져 있었다”는 동아일보 기사로 보도되며 박종철 열사의 진짜 사인(死因)을 세상에 드러내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지난달 본보와 만난 오 원장은 당시 고문치사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한 동아일보를 보며 “심지어 어느 날에는 1면부터 마지막 면까지 거의 박종철 기사로 채워진 날도 있었다. 속으로 ‘내 일생에 이런 신문을 다 보는구나’라고 감탄했다”고 회고했다.


▼ “물고문 흔적 최선다해 증언… 東亞가 연일 가장 강력하게 보도” ▼

1987년 1월 박종철 씨가 물고문으로 숨졌던 서울 용산구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를 찾은 오연상 오연상내과 
원장. 당시 물고문이 자행된 욕조가 보인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1987년 1월 박종철 씨가 물고문으로 숨졌던 서울 용산구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를 찾은 오연상 오연상내과 원장. 당시 물고문이 자행된 욕조가 보인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이 방이었지….”

지난달 서울 용산구 옛 남영동 대공분실(민주인권기념관 예정지) 5층 9호를 마주한 오 원장의 첫마디는 탄식이었다. 출구의 위치가 보이지 않는 건물의 좁고 긴 복도를 따라 오 원장의 기억도 3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가끔 꿈에서도 나와요, 처음 복도를 봤을 때의 인상이…. 맨 끝 창문으로 빛이 새어 들어오는 것 말고는 온통 컴컴했거든요. 공포영화처럼 분위기가 음산했어요.”

1987년 1월 중앙대병원 내분비내과 전문의였던 오 원장은 연구실에서 응급실장의 급한 전화를 받았다.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받던 학생이 상태가 안 좋다니, 서둘러 가 봐.” ‘남영동 대공분실’이라는 말부터가 생소했다. 구급차를 타고 5분쯤 갔을까. 같이 탄 대공분실 형사가 말했다. “조사받던 학생이 갑자기 호흡이 불안정해졌다. 술을 많이 먹어서 그런지 갈증이 난다고 물을 많이 먹더라.”

폭이 한 뼘도 안 되는 창문이 달린 조사실은 바닥이 온통 물바다였다. 심폐소생술을 하는 동안 바닥에 닿은 그의 가운에 흙탕물이 배었다. 한 시간 정도가 흘렀다. 오 원장은 이미 사망했다고 했지만 경찰은 병원 응급실에 데려갈 것을 요구했다. 형사들이 정신없이 시신을 옮기는 사이 오 원장은 대공분실 1층 사무실에서 병원에 전화해 몰래 “시신을 응급실로 들여보내면 안 된다”고 말했다. 그의 말에 따라 병원 응급실 앞에서 교수들이 팔짱을 끼고 “이미 사망했으니 영안실로 가는 게 맞다”며 시신의 진입을 막았다. 시신은 경찰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응급실로 들이면 사망 선고를 응급실에서 하게 되고 사망 장소가 대공분실이 아니라 병원이 됩니다. 많은 게(실체적 진실이) 희석되겠지요. 남영동의 형사도, 저도 그런 걸 예상했던 거지요. 이게 그나마 제가 한 일 중에는 잘한 일 같습니다.”

진실이 드러나는 데 대한 오 원장의 기여는 그뿐이 아니다. 16일 병원 진료실을 기자들이 찾아왔다. 오 원장 역시 직접 본 것이 아닌 이상 ‘물고문’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 ‘물’과 관련된 증언을 했다.

오 원장은 “동아일보 기자분이 질문을 주도하다시피 했다”라고 회고했다. 오 원장의 증언은 “호흡 곤란으로 사망한 것으로 판단됐으며 물을 많이 먹었다는 말을 조사관들로부터 들었다” “복부 팽만이 심했으며 폐에서 사망 시 들리는 수포음이 전체적으로 들렸다” “조사실 바닥에 물기” 등이었다. 이 내용은 17일 동아일보 지면에 그대로 실렸다. 이는 “신문 도중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며 쓰러져 병원으로 옮겼으나 숨졌다”는 경찰의 주장을 뒤집는 것이었다. 본보의 전날(16일) 특종 기사로 박 열사의 죽음이 경찰의 고문 탓임이 드러났고, 오 원장의 증언에 따라 그 수법이 ‘물고문’인 것까지 뚜렷해졌다.

물고문을 밝힌 오 원장의 증언이 실린 1987년 1월 17일 동아일보 
지면 일부분(위 사진). 오 원장을 ‘올해의 인물’로 선정한 그해 12월 30일 본보 1면.
물고문을 밝힌 오 원장의 증언이 실린 1987년 1월 17일 동아일보 지면 일부분(위 사진). 오 원장을 ‘올해의 인물’로 선정한 그해 12월 30일 본보 1면.
보도 뒤 그의 집과 병원에 “앞으로 재미없다” 등의 협박전화가 걸려오기도 했다. 오 원장은 검찰과 신길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은 뒤 잠시 몸을 피했다. 그동안 동아일보는 당국의 보도 통제에 정면으로 맞섰다. 1월 19일자에는 1면 톱부터 마지막 사회면까지 6개 면을 고문 관련 기사로 가득 채우기도 했다. TV 프로그램면과 문화·스포츠면 등을 빼면 거의 모든 지면이었다. 오 원장이 보고 ‘이런 신문도 있구나’ 했던 지면이다.

당시 그는 인터뷰에서 “의사로서 환자의 편에서 알고 있는 것을 솔직히 말했을 뿐”이라고 했다. 본보는 1987년 12월 ‘올해의 인물’로 오 원장을 선정했다. 오 원장은 이날 민주인권기념관 방명록에 “제자리에서 자기 할 일을 다하는 것이 국민 된 도리다”라고 썼다.

서울 중앙고를 졸업한 오 원장은 1974년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 당시 ‘3학년 7반 일동’이라는 명의로 광고를 내기도 했다고 한다. 오 원장은 “고교에 입학해 가장 먼저 들은 말이 인촌 김성수 선생의 좌우명 ‘공선사후(公先私後)’였다”면서 “내 선택에 그런 분위기가 알게 모르게 상당히 작용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오 원장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동아일보가 가장 강력하게 보도했다”면서 “동아일보가 전통과 역사를 지켜 나가면서 대한민국의 여론을 선도하는 역할을 해 달라”고 당부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동아일보#오연상 원장#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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