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가-상인 손에 맡긴 ‘셀프검사’… 노른자 빠진 계란 안전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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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충제 파동’ 정부대책 효과 의문]살균-세척기 갖춰야 유통 허가
업체들 “수억대 설비투자 부담”, 정작 안전성 확보 방안은 소홀
내달부터 산란일 표기도 의무화… 포장지 뜯기전 확인 못해 무용지물
유통기한 남아도 구매기피 우려도

24일 경기 연천군 안일농장에서 한 근로자가 계란 선별 작업을 하고 있다. 선별된 계란을 컨베이어벨트에 실어 보내면 세척과 살균 작업 등을 거쳐 출하된다. 연천=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24일 경기 연천군 안일농장에서 한 근로자가 계란 선별 작업을 하고 있다. 선별된 계란을 컨베이어벨트에 실어 보내면 세척과 살균 작업 등을 거쳐 출하된다. 연천=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24일 경기 연천군의 산란계 농장인 안일농장 내 계란 선별장. 밤새 닭이 낳은 ‘따끈따끈한’ 계란들이 컨베이어벨트를 타고 쏟아졌다. 육안으로 깨진 계란을 걸러낸 뒤 세척과 살균 과정을 거쳐 난각 코드가 새겨졌다. 이렇게 매일 14만 개의 계란이 선별돼 전국 각지로 팔려나간다. 안일농장은 국내에서 생산량 상위 5% 안에 드는 대규모 농장이다. 하지만 농장주 안영기 대표(49)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안 대표는 “정부가 허술한 계란 안전 대책을 내놓으면서 정작 안전성은 담보하지 못한 채 농가의 부담만 커졌다”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 ‘셀프 검사’로 안전 확보?

2017년 8월 ‘살충제 잔류 계란’ 파동 이후 정부가 내놓은 계란 안전 대책이 올해 4월 시행을 앞두고 있다. 하지만 대한양계협회는 지난해 12월부터 충북 오송 식품의약품안전처 앞에서 시행 유예를 요구하며 집회를 열고 있다. 여당 의원인 김현권 더불어민주당 의원까지 ‘현실과 동떨어진 대책’이라는 보도자료를 내며 정부를 비판하고 있다.

지난해 개정된 축산물 위생 관리법에 따라 4월 25일부터 모든 가정용 계란은 세척과 선별 설비를 갖춘 ‘식용란 선별포장업체’를 거쳐 유통해야 한다. 각종 오염물과 살충제 잔류 성분 등이 남아 있거나 깨진 불량 계란을 유통 전에 걸러내겠다는 취지로, 계란 안전 대책의 핵심 내용이다.

하지만 농가들은 “세부 내용을 들여다보면 맹탕”이라고 반발한다. 식용란 선별포장업 요건을 보면 기존 산란계 농장, 유통 상인들도 검란기와 파각검출기(깨진 계란을 골라내는 기계), 세척기, 건조기, 살균기 등을 갖추면 허가를 받을 수 있다. 결국 농장주나 상인들이 안전성을 ‘셀프 검사’하도록 한 셈이다.

안 대표도 최근 식용란 선별포장업 허가 요건을 맞추기 위해 1억2000만 원을 들여 검란기와 파각검출기를 구입했다. 농가나 유통 상인들은 선별포장업 허가를 받지 못하면 가정용 계란을 팔 수 없다 보니 ‘울며 겨자 먹기’로 설비를 구비하고 있다. 특히 대다수 유통 상인들은 농가와 달리 소규모 창고만 갖고 있어 설비 구입에만 수억 원을 들여야 한다.


○ 득보다 실이 많은 ‘산란일 표시’

소비자 알 권리 차원에서 시행하는 산란일 표기를 두고도 ‘득보다 실이 많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현재 계란 껍데기에는 농장 고유번호(5자리)와 사육환경(1자리)을 표시하고 있다. 다음 달 23일부터는 여기에 산란일(4자리)을 함께 새겨야 한다. 하지만 실제 소비자가 산란일을 확인하려면 계란 포장지를 뜯어 계란을 이리저리 돌려봐야 한다. 이 과정에서 2차 오염이 생길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산란일이 며칠 지난 것을 가지고 소비자들이 덜 신선하다는 잘못된 인식을 갖게 되는 것이다. 계란의 권장 유통기한은 30일이다. 냉장 상태에선 40일 이상 두고 먹어도 된다. 하지만 산란일을 표기하면 최근에 낳은 계란을 골라 사는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며칠 지난 계란은 유통 자체가 막힐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세계적으로 산란일 표시를 의무화한 나라는 없다.

김정주 건국대 명예교수는 “후진적인 계란 유통 구조가 계란 파동의 근본 원인인데, 이 문제는 건드리지 않고 산란일 표시나 식용란 선별포장업 신설 등 변죽만 울린 대책을 내놓았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공인된 집유장이나 도축장을 거쳐 유통되는 우유나 육류처럼 모든 계란이 모이는 ‘광역 계란유통센터’를 설치하고 냉장 유통 체계를 갖추는 게 계란의 안전성을 확보하는 근본 대책이라고 입을 모은다. 현재 농림축산식품부는 2022년 완료를 목표로 전국에 광역 계란유통센터를 짓고 있지만 현행 규정상으로는 수의사 검사 등을 통한 안전성 담보 장치가 없는 단순 집하장에 불과하다.

식약처는 계란 안전 대책의 시행 유예는 어렵다는 입장이다. 많은 농가와 상인들이 설비 투자를 이미 했기 때문에 이제 와서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이다. 이미 24곳이 식용란 선별포장업 허가를 받았고, 올 10월까지 100곳 이상이 허가를 받을 예정이다. ‘셀프 검사’ 지적에 대해 식약처는 “농가나 유통 상인이라고 선별포장업체를 운영하지 못하게 하면 오히려 영업 자유를 침해할 소지가 있다”며 “선별포장업체에 대한 엄격한 관리를 통해 계란의 안전성을 높이겠다”고 말했다.

연천=김호경 기자 kimhk@donga.com
#살충제 파동#정부대책 효과 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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