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지펀드 방어책 미흡” 80%… 가장 시급한건 차등의결권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7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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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엘리엇 막으려면/긴급설문]

‘풍전등화(風前燈火).’

동아일보가 해외 행동주의 헤지펀드들의 공격 가능성과 국내 기업들의 대비 현황 등에 대해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긴급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는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해외 투기자본들이 국내 기업의 취약한 지배구조를 파고들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커지고 있는데, 국내법은 이를 저지할 마땅한 방패가 전무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런 해외 자본의 공습이 국내 기업 스스로 지배구조의 허점을 개선하고 정부 및 정치권도 경영권 방어 장치 마련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는 계기가 될 것이란 전망도 내놨다.

○ 무방비로 노출된 국내 기업


전문가들은 마땅한 경영권 방어 수단이 없어 투기자본의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될 수밖에 없는 현실을 공통적으로 우려했다. ‘국내 기업들은 헤지펀드의 공격에 충분히 대비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전혀 그렇지 않다’와 ‘그렇지 않다’라는 답변이 40명 중 32명(80.0%)에 달했다. 10명 중 8명이 국내 기업들의 대비 능력이 없다고 본 것이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시장경제에서) 기업 간 또는 기업과 자본 간 경영권 분쟁 자체는 자연스러운 일”이라면서도 “그러나 경영권 보호 장치가 거의 없는 국내의 경우 공격과 수비에서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는 환경(level of playing field)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 게 문제”라고 설명했다.

국내 기업들에 충분한 대비책이 없다고 보는 이유(복수 응답)에 대해서는 ‘법적, 제도적 장치 미흡’이 43.1%로 가장 많았다. 이어 ‘적극적인 경영권 방어에 대한 사회의 비판적 시선’이라는 답변도 27.5%나 됐다. 반(反)기업 정서로 인해 기업들 스스로도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고, 정부나 정치권에서도 “대기업에만 혜택을 주려 한다”는 시선이 부담스러워 이 같은 장치를 마련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 경영권 방어 미흡 책임은 국회>기업>정부 순

2010년 법무부가 ‘신주인수선택권(포이즌필·경영권 분쟁 시 기존 주주가 시가보다 싼 가격에 지분을 매입할 권리)’ 도입을 골자로 한 상법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국회에서 폐기됐다.

당시 법안 통과 실패의 원인(복수 응답)으로도 전문가들은 ‘국민 정서상 대기업 특혜로 비쳐서’(41.5%)와 ‘경제민주화 등 정치적 상황 변화’(30.8%)를 가장 많이 꼽았다. 신석훈 전국경제인연합회 기업정책팀장은 “2010년 당시는 ‘공정사회’라는 얘기가 처음 나오던 때였고, 결국 국회도 그런 분위기에 휩쓸려 이 법안은 뒷전이 됐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경영권 방어 장치 마련이 지연되고 있는 데 대해 ‘국회’(38.2%), ‘기업’(35.3%), ‘정부’(23.5%) 순으로 책임이 있다고 했다. “경영권 방어 수단의 필요성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은 누구의 잘못이라고 말할 단계가 아니다”(국책연구기관 연구원)라는 의견도 있었다.

해외 헤지펀드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가장 시급한 것(복수 응답)으로는 가장 많은 31.4%가 ‘차등의결권 도입’을 택했다. 기업의 경영권을 보유한 대주주의 주식에 대해 보통주보다 더 많은 의결권을 부여하는 제도로 미국 일본 등 해외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보편화된 제도다. 신주인수선택권 도입도 25.7%의 지지를 받았다. 이런 제도적 장치보다 ‘대기업에 대한 비판적 국민정서 완화’가 더 시급하다는 전문가도 17.1%나 됐다.

○ 선진적 지배구조 및 제도 마련 계기 삼아야

이번 조사에서 상당수 전문가는 해외 투기자본의 공격이 국내 산업 발전에 치명적 악재로 작용할 것이란 우려를 나타냈다. 극단적 주주행동주의는 기업 가치 제고나 중장기적 성장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단기 차익 실현을 주요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한 민간연구소 연구원은 “외부 감시자의 견제를 통한 순기능적 측면이 있지만 기업 지배구조 개선에 드는 비용과 국부 유출 등을 감안하면 기업의 장기적 성장 관점에서는 역기능이 더 크다”고 했다.

한상일 한국기술교육대 산업경영학과 교수는 “국내 경제가 새롭게 도약하려면 적극적 투자를 통한 새로운 먹을거리 창출이 절실하다”며 “헤지펀드에 의해 경영활동이 좌지우지되면 모든 경영판단은 자본의 논리에 따라 이뤄질 수밖에 없어 저투자와 저성장의 악순환이 초래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해외 헤지펀드의 공세가 후진적 기업 지배구조 개선 등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제고하게 해 중장기적으로 긍정적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실제 ‘해외 자본에 의한 주주행동주의가 국내 기업 지배구조 개선에 도움이 되는가’란 질문에 응답자 40명 중 19명(47.5%)이 ‘그렇다’ 또는 ‘매우 그렇다’는 답변을 보내왔다. ‘전혀 그렇지 않다’와 ‘그렇지 않다’는 부정적 답변(11명)보다 많은 의견이었다.

권재열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해외 자본의 공격은 국내 기업 지배구조의 허점과 문제점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정부와 국회의 관심을 유도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분명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백흥기 현대경제연구원 산업정책실장도 “정부나 기업 모두 위기의식을 가지게 되면 선진적 제도 마련과 건전한 기업가치 제고에 힘쓸 동기부여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 삼성물산 합병 반대하는 엘리엇의 궁극적 목표는? ▼

“경영간섭 통한 투자이익 극대화” 55%
“주주 이익 위한 것” 7.5% 그쳐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는 지난달 4일 삼성물산 지분 7.12% 보유 사실을 공시하면서 화려하게 등장했다. ‘주주 가치 제고’를 명분으로 내세운 엘리엇은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간 합병 비율을 정면으로 반박하면서 파상공세를 펼치고 있다. 삼성 측은 합병 비율(제일모직 1 대 삼성물산 0.35)이 국내법에 따라 결정된 것이라는 논리로 맞섰다. 엘리엇이 ‘삼성물산 주주총회 결의 금지’ 및 ‘삼성물산 자사주를 매입한 KCC의 의결권 행사 금지’에 대해 제기한 가처분 신청에 대해 법원은 일단 삼성 측의 손을 들어줬다.

양측의 논리에 대한 전문가들의 생각은 어떨까.

‘삼성물산과 엘리엇 중 어느 쪽 의견이 맞다고 보느냐’는 질문에 전체 40명 중 38명이 응답했다. 이 중 절반에 가까운 18명(47.4%)은 ‘양측 주장 모두 일리가 있다’고 답했다. 삼성물산을 지지한 응답자가 11명(28.9%), 엘리엇 주장에 동조한 이가 8명(21.1%)이었다. 삼성그룹이 법적인 부분에서는 문제가 없도록 합병을 추진했지만, 주주 가치 제고라는 엘리엇 측 명분도 상당한 지지를 얻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엘리엇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는 않았다. ‘엘리엇의 궁극적 목표’를 묻는 질문에 응답자 40명 중 ‘삼성물산 주주들의 이익 극대화’라고 답변한 사람은 3명(7.5%)에 불과했고, 대부분이 ‘경영권 간섭을 통한 투자이익 극대화’(55.0%) 또는 ‘단기 시세차익’(35.0%)이라고 판단했다. 전문가들은 또 엘리엇과 같은 행동주의 헤지펀드에 대해 ‘주주들의 구세주’(13.5%)보다는 ‘탐욕의 약탈자’(86.5%)로 보는 시각이 압도적이었다.

● 설문조사에 응한 분들

<대학교수>
△권재열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김화진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전삼현 숭실대 법학과,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한상일 한국기술교육대 산업경영학과 <국책연구기관> △산업연구원 3명 △한국개발연구원 3명 <민간연구기관>△배상근 부원장 등 한국경제연구원 4명 △백흥기 현대경제연구원 산업정책실장 △중소기업연구원 6명 △포스코경영연구원 3명 △SK경영경제연구소 3명 <증권사> △교보증권 메리츠종금증권 신한금융투자 유안타증권 하나대투증권 한국투자증권 한화투자증권 KDB대우증권 KTB투자증권 NH투자증권 1명씩 <기타> △신석훈 전국경제인연합회 기업정책팀장

김창덕 drake007@donga.com·황태호·정임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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