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커버스토리] ‘타이탄’ 발목 잡은 ‘베스트셀러’ 엄정화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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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4월 22일 15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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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년 연기 내공 드러난 히스테릭하지 않은 히스테리 연기
● 원칙에 충실한 '장르 연기', 그래서 더 빛나는 그녀
● 미셸 파이퍼·메릴 스트립도 40대 이후 전성기


올해 골든 글로브 여우주연상을 받은 샌드라 불럭은 마흔 여섯이다. 로맨틱 코미디물의 아이콘 제니퍼 애니스톤은 마흔 하나, 스릴러 코미디 가리지 않고 종횡무진하는 조디 포스터는 마흔 여덟이다. 하지만 한국에선 티켓 파워를 휘두르는 40대 여배우를 찾기가 어렵다.

그래서 애니스톤과 동갑내기인 69년생 엄정화의 존재는 더욱 빛이 난다. 15일 개봉한 엄정화 주연의 스릴러물 '베스트셀러'가 7주 만에 한국 영화론 처음으로 '타이탄'을 제치고 일일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 강동원 송강호 주연의 '의형제' 이후 한국 영화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타이탄' 등 대작 외화에 밀려 극장가에서 맥을 못 추고 있었다. '베스트셀러'가 구원투수처럼 등장해 한국 영화의 자존심을 세워준 것이다.

'여자 원톱은 안 된다'는 영화계 속설을 깬 엄정화는 일찌감치 연말 영화제 여우주연상 유력 후보로 점쳐지고 있다. '베스트셀러'는 그동안 평가 절하된 '장르 배우' 엄정화의 진면목을 대중에게 알린 셈이다.

희수는 점차 연희가 언니로부터 들었다는 별장에서 벌어졌던 섬뜩한 이야기에 집착하고, 결국 그 이야기를 소설로 완성시킨다.
희수는 점차 연희가 언니로부터 들었다는 별장에서 벌어졌던 섬뜩한 이야기에 집착하고, 결국 그 이야기를 소설로 완성시킨다.


▶ 엄정화를 위한, 엄정화에 의한, 엄정화의 영화

'베스트셀러'는 표절 낙인을 떼고 재기를 노리는 베스트셀러 작가 백희수(엄정화)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10년간 베스트셀러 작가로 군림하다 단 한 번의 표절로 나락으로 떨어진 백희수. 한적한 시골 별장에 칩거하며 작품 집필에만 몰두하려던 그녀는 일에 대한 강박 때문에 제대로 글을 쓰지 못한다.

쌓여가는 담뱃재만큼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가던 어느 날, 희수는 딸 연희(박사랑)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사로잡힌다. 위층 골방에 산다는 어떤 '언니'가 전해준 이야기다. 아이가 지어냈다고 하기엔 몸서리쳐지는 살인 사건이었다. 희수는 이 이야기를 토대로 소설을 발표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지만, 또 다시 표절 시비에 휘말린다. 그녀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위해 소설의 소재가 된 살인 사건을 추적한다.

영화를 위해 7kg을 감량한 엄정화는 강박증에 걸린 작가 백희수로 완벽하게 거듭났다. 목욕신에 공개된 그녀의 뒤태는 애처로움 그 자체였다. 가냘픈 등판에 앙상하게 도드라진 등뼈가 하얗게 날을 세웠다. 그녀는 눈 그늘이 짙은 퀭한 눈으로 우는 아이를 살살 토닥거리며 '언니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탐욕스럽게 집착한다.

"연희야, 언니가 뭐라고 했어? 엄마한테 얘기해.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후반부에선 하이힐을 신은 채로 지붕 위에서 구르고 발목에 쇳덩이를 매단 채 하천 바닥에 가혹하게 내던져진다. 두들겨 맞는 것은 다반사다. 특히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에서 망가진 손톱을 빼는 장면은 스릴러 장르 특유의 전율을 소름끼치게 전해준다.

극중 남편으로 나오는 배우 류승룡이 "엄정화를 위한, 엄정화에 의한, 엄정화의 작품"이라고 말할 정도로 엄정화의 존재감은 대단했다.

표절 혐의를 받게 된 희수는 사회적 명성을 잃고 2년 동안 창작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오랜 친구인 출판사 편집장의 권유로 재기를 꿈꾸며 딸 연희와 함께 외딴 별장으로 내려간다.
표절 혐의를 받게 된 희수는 사회적 명성을 잃고 2년 동안 창작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오랜 친구인 출판사 편집장의 권유로 재기를 꿈꾸며 딸 연희와 함께 외딴 별장으로 내려간다.


▶ 절제의 연기 미학…'대배우' 엄슨생

그럼에도 엄정화는 스릴러에 출연하는 배우들이 흔히 범하는 '과장된 연기'의 유혹을 이겨냈다.

오래된 배우답게 그녀는 최대한 내지르는 걸 자제하고 속으로 잦아드는 노련한 연기를 펼쳤다. '베스트셀러'는 그녀의 예전 작품보다는 에픽(서사)이 강하고 강렬하다. 대신 그녀는 절제하는 연기로 일종의 평행을 이룬 셈이다.

동아일보에 영화 칼럼 '무비홀릭'을 연재하는 이승재 영화평론가는 "원톱이라는 자리가 부담스러울 만도 한데, 그녀의 연기에선 강박감이 보이지 않는다"며 "보통의 배우라면 이런 역할을 연기할 때 쉽게 비등점을 넘어 버릴 수 있으나 그녀는 뛰어난 연기력으로 정도를 유지했다. '역시 대배우구나!'라고 느꼈다"고 평가했다.

오동진 동의대 영화과 교수는 "캐릭터와 '맞짱' 뜨는 느낌이랄까, 배역에 잘 붙어 있고 톤 유지 능력도 대단하다. 연출자와 교감을 상당히 잘한다"며 "과감성과 용감성이 있다. 에너지와 힘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유능한 전문직 여성에서 아이를 잃은 엄마, 못 배운 주부까지 다양한 장르에서 폭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보여 온 연기자 엄정화. 그녀는 '오로라 공주'와 '베스트셀러'에서의 잇따른 호연으로 '스릴러 퀸'이라는 호평까지 끌어내며 대배우로서 진면목을 평가 받고 있다.

할리우드 '디파티드' 제작진은 리메이크 판권 구매의사를 밝혔고, 백희수의 집필 공간인 전남 장흥군 소재의 저수지 옆 외딴 별장 세트(극중 '베이츠 선교사 사택')까지 관심의 대상이 됐다.

희수가 작업을 하는 동안 방치된 딸 연희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언니라는 존재와 놀기 시작한다.
희수가 작업을 하는 동안 방치된 딸 연희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언니라는 존재와 놀기 시작한다.


▶ "묵묵한 장르 연기가 국·영·수라면, 눈에 띄는 비 장르 연기는 예체능"

1990년대 '최고의 디바'로 가요계를 평정한 그녀지만, 바로 그 섹시 가수 이미지 때문에 영화계에선 박한 평가를 받았다. 2003년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분 최우수 연기상, 2005년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여우주연상 등을 받았을 뿐 상복도 그저 그랬다. 1992년 영화 '바람 부는 날에는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로 데뷔해 무려 19년 차 배우라는 게 무색할 지경이다.

그럼에도 엄정화는 묵묵히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소화해 냈다. 멜로드라마 '결혼은 미친 짓이다' '싱글즈'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습니까', 로맨틱 코미디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음악 영화 '호로비츠를 위하여', 범죄 스릴러 '오로라 공주', 재난 영화 '해운대' 등.

이 평론가는 "엄정화는 장르적이다. 그리고 이 점이 가장 큰 강점"이라고 평가했다.

멜로, 코미디, SF, 액션 등 장르 영화는 익숙하고 보편적인 장치로 장르적 즐거움을 준다. 반면 비 장르 영화는 개성적인 인물과 상황을 토대로 복잡하고 모호한 주제를 표현하는 경향이 있으며 기존 장르영화가 전달하는 친숙함이 없다.

흔히 국내 영화계는 비 장르적인 센 역할만 칭송하며 장르적인 역할은 상투적이라고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액션, 스릴러, 로맨스 장르에서 인정받은 슈퍼스타 브래드 피트의 사례에서 보듯 할리우드에서는 장르 연기를 잘하는 배우를 대접한다는 것.

"익숙한 장르, 익숙한 역할이 더 연기하기 어렵다. 관객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면서 뛰어넘어야 하니까, 공부로 치면 국영수로 승부를 겨루는 셈이다. 비 장르적인 역할은 세긴 하나 예체능이라고 볼 수 있다. 엄정화는 단숨에 시선을 사로잡는 '레드'보다는 '파스텔' 색조인 배우이다."

이 평론가의 배우 엄정화론은 '베스트셀러'의 연출을 맡은 이정호 감독의 평가와도 일치한다. 그는 "엄정화는 모든 장르가 가능한 유일한 배우"라며 처음부터 영화의 주인공으로 그녀를 떠올렸다고 말했다.

엄정화는 장르적인 연기를 기반으로 20대 후반에서 30대 후반까지의 여성들의 모습을 구현하는데 천재적이라는 평가도 듣는다. 지난해 그녀가 30대 후반 노처녀 의사로 나온 드라마 '결혼 못하는 남자'는 사회적으로 '건어물녀(결혼에 생각 없는 여자)' '초식남(남자)' 논쟁을 유행시키기도 했다.

▶ 한국의 미셸 파이퍼, 메릴 스트립으로…

여배우 엄정화는 언제까지 갈 수 있을까.

오 교수는 "미셸 파이퍼, 메릴 스트립처럼 할리우드를 보면 40~45세 때 여배우들이 꽃핀다"며 "사회가 현대화 자본주의화할수록 여배우들의 전성기 나이가 올라간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이 평론가는 "세간에서는 엄정화를 '한국의 조디 포스터'라고 부르지만, 나는 그녀를 제니퍼 애니스톤 부류의 사랑스런 여배우로 본다"라며 "'베스트셀러'처럼 장르적이지만 거기서 조금 더 나아간 영화를 고른다면 오래갈 것으로 본다"고 전망했다.

엄정화는 '베스트셀러'를 놓자마자 쉴 틈 없이 다음 작품을 물색하고 있다. 전국 개봉관 무대 인사를 다니는 틈틈이 감독을 만나 영화 출연을 타진 중이다. 현재로선 살인 사건을 쫓는 남녀가 주인공인 다이내믹한 액션 스릴러물에 출연하는 것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현정 기자 phoeb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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