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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2칼럼/박지하] 당신의 장희빈은 누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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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2칼럼/박지하] 당신의 장희빈은 누구입니까

동아닷컴입력 2010-04-22 15:00수정 2010-04-26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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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동이'에서 장희빈 역을 맡은 이소연은 "역대 장희빈과 다른 인물 만들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출처: MBC

당신의 장희빈은 누구입니까? 대답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윤여정부터 이미숙, 전인화, 정선경, 김혜수 그리고 최근 드라마 '동이(MBC)'의 이소연까지. '장희빈'이라고 할 때 떠올리는 여배우의 이름을 통해 그 사람의 연령대를 추측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장희빈 이야기는 그만큼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드라마 소재다. 바닥에서 시작해 중전의 자리에까지 올라갔다가 사약을 받게 되는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 여기에 당쟁으로 물든 궁중암투의 이야기가 겹치니 이보다 더 흥미진진한 인물이 흔하겠는가.

그래서 장희빈은 지난 40여 년간 여섯 번이나 드라마로 제작되었다. 아마 여성 사극 주인공으로는 최다 등장이 아닐까. 장희빈은 미모로 왕의 눈을 멀게 하고 후덕한 인현왕후를 음해한 표독스러운 악녀의 대명사와 같았다. 부릅뜬 눈과 카랑카랑하게 내지르는 목소리야말로 장희빈의 상징이었다.

▶'불가능한 것을 바라는' 2010년판 장희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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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모든 드라마의 장희빈들이 똑같은 이미지였던 건 아니다. 현대로 올수록 장희빈은 조금씩 더 인간적으로 변해왔다. 2003년 김혜수의 장희빈은 악의 화신에서 욕망을 가진 여자 장희빈으로 변한다. 숙종에게 사랑받고 싶고, 모든 것을 가지고 싶은 여자. 그러나 그들은 하나같이 사악했고, 주인공의 자리에 있었다.

특히 2010년의 장희빈은 상당히 다르다. 드라마 '동이'에 나오는 장희빈은 지금까지는 전혀 사악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정적들에 의해 누명을 쓰기도 한다. 말투도 후덕하고 임금과의 대화에는 지성미가 흘러넘친다. 그녀의 욕망은 과거의 장희빈들 같은 욕심이나 사랑받고 싶어하는 욕망이 아니라, 중인인 자기의 처지에 굴하지 않으려는 '불가능한 것을 바라는' 전복적인 욕망이다. 자신이 신분제를 뛰어넘기를 꿈꾸는 만큼 천비인 동이에게도 같은 포부를 바라며, 동이의 방자한 언행에도 아량을 보이는 인물이다. 숙종의 사랑은 언제 변할지 모르니 빨리 회임해야 한다는 친정어머니에게 나는 남편이나 자식이 아니라 나 자신을 믿는다고 말하는, 그야말로 새로운 장희빈인 것이다.

장희빈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지금까지 역사가 그려온 인물상을 뒤집고 있다. 그러나 그녀가 악녀로 그려진 것은 결국 정쟁의 희생양이 된 탓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장희빈과 남인들은 정쟁 대립구도에서 결국 패배했고, 승자인 서인들이 역사를 기록했기 때문에 더욱 가혹하게 묘사되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장희빈을 알던 사람들이라면 혼란스러울 법도 하다. 그러나 실제 장희빈이 어떤 인물이었든지 간에, 이러한 변화로 말미암아 역사란 결국 승자, 즉 서술하는 사람들의 관점에 영향을 받는다는 점이 전달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내 마음 속의 장희빈은 어린 시절 처음 본 전인화

1988년 MBC \'조선왕조500년 인현왕후\'에서 장희빈을 맡은 전인화. (사진출처=동아일보 자료사진)

나는 이 우아하고 지적인 2010년의 장희빈이 마음에 든다. 그러나 나에게 장희빈은 언제나 전인화다. 어릴 때 보았기 때문이다. 1988년 조선왕조 500년 - 인현왕후가 방영될 당시에는 전인화 씨가 우리 동네에 산다는 것이 당시 또래 초등학교 아이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녀를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드라마와 현실을 아직 완전히 구분하지 못하는 어린 마음에 그런 나쁜 사람과 같은 동네에 산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장희빈은 실제 '동네'에 존재하기엔 너무 악독한 여자였으니까. 같은 동네에 산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나빴던 그 장옥정.

사실 역대 장희빈 중에서는 정선경의 장희빈이 시청률 40%로 가장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그러나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장희빈은 자신이 어릴 적에 본 장희빈일 것이다. 자신이 기억하는 한 맨 앞에 있는 장희빈. 어릴 때 본 그 이미지는 이후에 새로운 장희빈들이 나타났다고 해서 쉽게 대체되는 것이 아니다. 어릴 때 본 사극의 내용들은 그것이 정말 역사라고 믿게 되기가 쉽다. 그래서 역사적 실존인물이나 사건을 다루는 사극은 꼼꼼한 고증이 필요하고 극적 상상력이 무제한으로 허용되기보다는 역사왜곡의 시비에 휘말리기 쉽다.

그런데 사극 작가와 감독들의 과도한 상상력 탓에 생길 수도 있는 어린이들의 오해를 바로잡아 줄 기회가 줄어들게 생겼다. 교육과정이 개정되면서 국사를 배우지 않고도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물론 국사를 선택한다면 배울 수 있지만, 공부할 것이 많은 과목 특성상 현재 수능에서 국사를 선택하는 비율이 10%대라고 하니 앞으로도 크게 기대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좋게 말해 학생의 선택권을 넓혀주는 것이지만 그 선택 앞에 놓인 입시 준비라는 현실적인 조건들을 뻔히 안다면, 그것을 교육과정 '개정'이라 부를 수 있을까.

장희빈은 극성이 강한 인물이지만 굳이 따지자면 역사적 핵심 인물은 아니다. 그러니까 사실 각자가 각자의 드라마에 대한 장희빈을 가지고 있어도 좋다. 어떤 이는 장희빈을 악의 화신으로 기억하고, 누구는 요부로 기억하고, 또 누구는 지적이고 진취적인 여성으로 기억한다고 해도. 그러나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아이들이 '대왕세종'으로 세종대왕을 기억하는 것이 전부이고 '이산'으로 정조를 기억하는 것이 전부가 돼 버리는 건 아닐까. 요즘은 예전처럼 하나의 드라마를 집단적으로 시청하는 현상도 점점 약화되고 있으니 세종대왕이 '만원 아저씨'로 기억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

드라마는 누군가를 교육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일상의 고단함을 잠시 잊게 해주고 다른 이의 삶 속으로, 모험의 세계로 데리고 가 주는 것이다. 당신의 장희빈은 누구입니까, 이런 질문은 그저 즐겁게 나눌 수 있는 얘깃거리로 남겨두자. 사극 제작자들에게는 선을 넘지 않은 한에서 상상력을 발휘하고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게 해주고, 기본적인 역사에 대한 사실 교육은 모두가 학교에서 받을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은 과욕인가.

박지하/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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