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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2칼럼/정주현] 사이즈는 숫자에 불과, ‘사이즈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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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2칼럼/정주현] 사이즈는 숫자에 불과, ‘사이즈의 문제’

동아일보입력 2010-04-22 15:00수정 2010-04-26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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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뚱뚱한 것이 죄가 되는 시대다. 거리에는 마른 사람들이 넘쳐나고 다이어트 시장은 세계적인 황금어장으로 여겨진다. 먹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게 된 사람들은 거식증이라는 병적 증상에 도달하기도 한다. '먹어도 살이 안 쪄서 고민이예요' 라고 말해보라. 진심 어린 야유를 받게 될 테니.

하지만 영화 속 주인공인 헤르젤은 뚱뚱한 것이 왜 나쁜지 알 수가 없다. 세상에는 맛있는 음식이 너무나 많고 그는 이 음식을 좋아할 뿐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뚱뚱했다. 그래서 뚱뚱한 것이 곧 삶이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에게 맞는 옷이 없어지기 시작한 때부터 엄마가 바느질을 시작한 것만 빼면, 덩치가 좀 큰 것이 뭐 그리 대수인가.

그런데 사람들의 생각은 좀 다른 듯 하다. 다이어트 학원의 선생은 헤르젤을 고래라 부르고 '입은 말할 때만 쓴다'고 교육시킨다.(이런!) 음식점 종업원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다이어트 콜라를 가져다준다. 일하는 식당에서는 손님들이 부담스러워하니 서빙을 그만두고 주방으로 들어가라고 한다.

사람들은 가끔씩 독설도 서슴지 않는다. 같은 다이어트 클럽에 다니던 제하라는 그 몸으로 임신을 하는 것은 미친 짓이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남자친구인 헤르젤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너는 평생 그렇게 산다 치고, 손자라도 좀 날씬해야 할 것 아니냐'고 말하며 노골적으로 제하라에게 눈치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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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만이 극복의 대상이라고?

건강하고 보기 좋은 몸의 기준은 뭘까. 영화 '사이즈의 문제'는 몸의 이데올로기와 우리가 무심코 저지르는 비만, 성, 인종 등과 관련한 다양한 차별 이슈들을 다룬다.

이 정도의 편견으로 비참하게 고통 받았다면 그 다음은 비만을 극복하기 위한 주인공들의 눈물겨운 투쟁기가 이어지는 것이 영화적 상식이라면 상식일 것이다. 먹고 싶은 것을 참고 혹독하게 다이어트를 하여 '짜잔' 하고 멋진 사람으로 거듭나는 일종의 신데렐라 이야기 말이다. 그리고 이 피나는 인간승리를 정점으로 갈등은 풀어지고 주인공들은 행복한 결말을 맞는 것이 대부분의 오락 영화에서 예정된 수순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러한 상식을 뒤집는다. 섣불리 외모지상주의를 꼬집으려 하지도 않고 '예쁜 마음이 제일이지요' 라는 진부한 교훈을 주려고 하지도 않는다. 주인공을 괴롭히던 사람이 도덕적인 감화를 받는 일 따위도 없다. 왜냐 하면 이 영화는 비만을 극복해야 할 문제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는 주인공들이 다이어트 클럽에서 몸무게를 재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그들은 곧 반란을 일으킨다. 등 떠밀려 오긴 했지만 인간적으로 모욕을 당하면서까지 살을 빼야 하는 것인지, 과연 비만이 그 정도로 '나쁜'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클럽 문을 박차고 나온다.

몸무게 때문에 자신을 제대로 인정해주지 않는 직장까지 홧김에 그만 둔 헤르젤은 일식집에서 접시 닦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어느 날 TV에서 일본 스모 경기를 보게 된다. 자기 보다 더 뚱뚱한 사람들이 박수를 받으며 경기를 하고 있다. 그의 눈엔 신천지와 같은 장면이다. 와, 저런 것이 다 있다니.

그리고는 곧 아론, 삼미, 기디 이 세 명의 절친들과 제하라까지 불러 모아 스모를 하자는 제안을 한다. 그리고 한 때 스모 코치였던 식당 주인 키타노에게 스모를 가르쳐달라고 한다. 하지만 키타노는 거절한다. 당연하다. 스모란 스포츠 자체가 생소한 이역만리 타향 이스라엘에서, 잘 알지도 못하는 헤르젤에게 굳이 그런 공을 들일 필요가 없지 않은가. 더구나 헤르젤은 스모를 하기엔 너무 날씬(!)한데 말이다.

하지만 헤르젤은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그의 열정은 생각보다 뜨겁다. 혼자 경기를 보며 동작을 따라 해 보기도 하고, 손수 스모 연습장을 만들기도 한다. 음식 외에는 어떤 것에도 집착해 본 적이 없는 그이지만 이번만큼은 다르다. 왜냐하면 스모는, 처음으로 그가 비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무언가 이니까.

▶ '육중한 몸' 그대로 인정받는 돌파구, 스모

스모는 남들에게 뚱뚱하다고 구박받는 '육중한 몸'도 미학적, 스포츠적 가치가 있는 몸으로 대접받게 하는 일종의 '돌파구'였다.

그리고 그들이 드디어 스모 연습을 시작했을 때, 이 영화의 본격적인 웃음이 시작된다. 네 명의 거대한 빅 브라더스가 (그들에게는) 실오라기 같은 빨간색 스모복을 입고 푸른 초원을 달리는 장면은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난다. 그 누구의 눈총이나 간섭 없이 자신 있게 자신들의 몸을 드러내는 것은 아마도 그들의 인생에 처음 있는 일일 것이다.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고 구르며 스크린을 꽉꽉 채우는 이들의 모습은 그래서 더욱 유쾌하다.

움직이기만 해도 개그가 되는 이들의 코믹한 모습은 시종일관 우리를 웃게 만든다. 하지만 이 웃음은 결코 육중한 그들의 몸에 대한 안쓰러움의 표현은 아니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스스로에게만 충실한 주인공들에게 보내는 격려이자 순수한 즐거움의 표현이다. 그리고 콤플렉스가 더 이상 콤플렉스가 아닐 때, 인간은 저렇게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영화의 메시지에 대한 동의의 표현이기도 하다.

물론 이 영화는 웃음만을 주는 가벼운 코미디는 아니다. 극의 중간중간에는 세상의 편견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가 있다. 이들은 세상의 편견에 시달려온 희생자들이지만, 때로는 또 다른 편견의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이는 게이인 기디를 놀리는 친구들의 모습에도 묻어있고, 일식집 종업원들에 대한 아론의 서슴없는 발언에서도 발견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일본 사람들은 다 비슷하게 생겨서 구별할 수가 없어. 그러고 보니 예전에 우리 집 가정부로 일했던 사람이 중국사람이었던가? 아니면 일본사람이었던가?"

▶ 나와 다른 것에 대한 가혹한 '차별'

육중한 몸이 장점이 될 수 있는 스포츠, 스모에 빠진 주인공들. 이들은 비만을 \'극복\'의 대상이 아닌 \'활용\'의 대상으로 생각했다.

사람들은 뚱뚱한 사람을 차별하고, 뚱뚱한 사람은 외국인을 차별하며, 외국인은 여자를 차별한다(키타노는 연습장에서 스모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여자인 제하라를 매몰차게 쫓아냈다). 이렇게 우리는 자신과 다른 모습의 누군가를 늘 차별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남에게 가하는 차별은 결국 나 자신에게 되돌아 올 수도 있다. 결국 차별은 돌고 도는 것. 그럼에도 우리는 차별을 계속한다. 과연 이 차별의 사슬을 끊을 수는 없는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은 헤르젤이 자신과 제하라를 구박하는 엄마에게 던지는 일갈 속에 담겨있다. 자신의 엄마를 거울 앞으로 데려가 펑퍼짐하게 퍼진 히프를 가리키며 헤르젤은 이렇게 속삭인다. "이것 보세요. 엄마가 누굴 욕할 처지는 아니잖아요." 죄가 없는 자가 돌을 던지라는 성경 속의 오래된 가르침을, 이 이스라엘 영화는 이렇게 조용하지만 날카롭게 상기시킨다.

결국 이들은 스모 대회를 잘 치러내고, 헤르젤은 우승을 차지한다. 물론 이것이 모두를 구원해주는 행복한 결말은 아니다. 아론은 아내가 바람난 (역시나 뚱뚱한) 상대를 보며 문제의 본질은 자신의 비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뚱뚱한 몸 때문에 지레 겁을 냈던 기디는 용기를 내어 컴퓨터 채팅 상대를 찾아간다. 그리고 제하라는 '미친 짓'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임신을 하고는 당당하게 행복해 한다. 누가 뭐라 건 앞으로도 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인생을 살아나갈 것이라는 확신이 이 영화의 진짜 결말이다.

입은 말하기 이전에 먹으라고 있는 거다. 남은 내 인생을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 덩치가 좀 큰 것이 뭐 그리 대수인가. 나만 행복하면 됐지.

정주현 영화진흥위원회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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